대부분 열네 살에서 열아홉 살가량의 청소년 650여명이 들뜬 마음으로 섬에 모여들었다.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집권 노동당의 청소년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공무원 또는 노동당원인 부모의 영향으로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에게 정치적 신념은 뒷전이었다. 내일이면 총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 여름 캠프에서의 로맨스. 아이들은 이런 것을 꿈꾸었다. 불과 몇 시간 후 닥칠 끔찍한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후 5시30분쯤, 오슬로 총리청사 인근에서 2시간 전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이 이곳에도 전해졌다. 아이들은 건물에 모여 폭탄테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찰복을 입고 배지를 단 한 남성이 건물 주변에 있었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폭탄테러 사건 때문에 자신이 경계근무를 나왔다며 다들 모이라고 했다. 그는 오슬로 청사 인근에서 폭탄을 터뜨린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였다. 테러 직후 경찰복으로 갈아입고 유유히 이 섬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름을 엘리세(15)라고만 밝힌 생존자는 “경찰 복장의 남성이 모두 가까이 오라고 한 뒤 갑자기 가방에서 자동소총을 꺼내 쏘기 시작했다”고 AP통신에 당시 상황을 전했다.
영문 모를 총격에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폭 300m, 길이 500m인 작은 섬 전체에 공포가 급습했다. 헬렌 안드레센(21)은 건물 안에서 총소리를 듣고 2층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총을 든 한 남자가 따라왔다. 안드레센과 친구들은 목숨을 걸고 뛰기 시작했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지만 가까스로 호숫가까지 도망쳤다. 테러범이 제발 물 속까지 따라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는 헤엄쳐 달아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총을 쏘아댔다.
안드레센은 “그는 물가에 서서 소총을 들고 한 명 한 명을 겨눴다. 어린아이들을 향한 학살이었다”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약 1시간30분간 범인 한 명이 섬 전체를 휘젓고 다닐 동안 살아남은 이들은 건물 바닥에 엎드리거나 바위틈 또는 언덕 곳곳에 숨을 죽이고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경찰은 오지 않았다. 범인은 숲과 절벽, 바위가 많은 해변을 샅샅이 뒤졌다. 섬과 육지를 연결해주는 다리는 없었다. 시간은 범인의 편이었다.
게다가 범인은 침착했다. 이미 여러 명을 사살한 뒤에도 태연하게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구해주겠다며 모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한곳에 모이자 그의 총은 다시 불을 뿜었다.
프라블린 카우어(23)는 바닷가에서 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하고 있었다. 카우어는 “정말 무서웠다. 범인이 주변에 총을 쏘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말했다. 약 1시간 후 비명소리가 잦아들자 겨우 고개를 들었다. 바닥은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이미 최소 85명의 아까운 목숨이 사라진 뒤였다. 경찰의 늑장대응이 피해를 키운 셈이다. 희생자 대부분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온 이민자 아이들이었다.
스베이능 스폰하임 경찰청장은 “헬리콥터를 구하지 못해 섬으로 건너갈 배를 찾다 보니 출동이 늦어졌다”고 해명했다. 범인은 경찰이 도착한 뒤 순순히 투항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공범 있나, 없나=범인은 단독 범행을 주장하고 있지만 경찰은 공범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경찰이 공범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것은 사건 현장에 총을 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 때문이다. 90명에 가까운 사람을 1시간30분간 단독으로 살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정부 청사와 우토야 섬 두 곳에서 잇따른 범행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힘든 일이다. 경찰은 이에 따라 공범을 찾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노르웨이 경찰은 오슬로 동부 산업지대에서 차고 등을 급습했다. 그러나 급습 장소에서 폭발물 등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아 붙잡은 용의자 6명을 풀어줬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