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영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번번이 직접 만나기 전부터 세상의 화제가 돼 있다. 만드는 영화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계적 영화제인 칸의 러브콜의 여덟 번이나 받은 감독이다 보니 개봉 전에 영화제 진출 소식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이번 65회 칸국제영화제만 해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데이빗 크로넨버그, 켄 로치, 크리스티안 문쥬, 레오 까락스 등의 세계적 거장들과 어깨를 견주는 경쟁부문에 초청됐으니 세트 제작비만 3억 5000만 원을 들였다는 임상수 감독의 대작 ‘돈의 맛’과 나란히 진출했으니 당연 영화계 이슈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거장, 대작 영화와 한 묶음으로 존재하니 왠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예술영화 같은 인상을 갖게 되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 그 높던 심리적 벽이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맞아,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이렇게 내 얘기처럼 친근하고, 아무도 모르게 잘 감춰 두었다고 생각하는 내 치부를 끄집어 내지. 그래서 더 진짜 같고, 그래서 더 웃음이 나고…’. 출세한 친구에게 심리적 거리를 느끼다 직접 만나 보니 예전 그대로의 순수함과 소박함을 가지고 있어 몇 배는 더 반가운 느낌이랄까.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포착해 즉흥적으로 버무려 낸 듯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 보다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싶게, 너무 진지하지 않아서 불편하지 않게 인간과 세상을 얘기하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매력이 이번 ‘다른 나라에서’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홍상수 영화’가 주는 쾌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꽤나 곱디곱게 결이 다듬어져 있다.
줄거리 설명은 관객의 감상을 위해 아끼는 편인데 구조가 독특해 조금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먼저 빚에 쫓겨 전북 부안의 모항 마을에 도피해 온 여대생이 있다. 여대생은 심리적 불안과 무료함을 줄이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영화의 주요 내용은 여대생이 쓰는 세 명의 안느에 관한 이야기다.
잘 나가는 프랑스 감독 안느, 한국 남자를 애인으로 둔 유부녀 안느, 한국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홀로 된 안느. 세 명의 안느 이야기가 차례로 이어지는 가운데 이름 같고 얼굴도 같은 세 명의 안느 스토리는 예상치 못한 재미를 잉태한다. 세 가지 이야기가 주목하는 주된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앞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겹치고, 소소한 상황과 대사가 겹치면서 관객은 언제부턴가 지나간 이야기 하나 혹은 둘과 지금 보는 이야기를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톰 크루즈가 허공에 자료들을 띄워 놓고 검토하듯) 머릿속 ‘창’에 나란히 띄워 놓고 같은 점과 다른 점, 그 미묘한 차이를 기억해 내고 찾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테면 안전요원(유준상)이 안느(이자벨 위뻬르)에게 ‘I protect you’(내가 너를 보호하겠어)라는 말을 한다면 이전 이야기에서는 그 구체적 표현이 조금은 어떻게 달랐는지, 세 가지 이야기 모두에 이 말이 나왔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며 비교하고 대조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매 이야기마다 안느에게 길을 알려 주겠다고 나서는 여대생 원주(정유미)의 옷차림은 같았는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떠올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안느는 매번 ‘등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이야기마다 물어보는 대상이 다르다. 보다 크게는, 방금 안느와 안전요원이 만났다면 이전 이야기에서는 안느와 안전요원이 이야기 흐름의 어느 시점쯤에서 어떤 방식으로 조우했는지 떠올려 보게 되고 이번 이야기에서는 만나지 않는 것인가 기다리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세 명의 안느가 다른 나라에서 겪는 세 가지 경험이 말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또 그 세 가지를 관통해 감독이 관객에게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작디작고 사소한 깨달음이지만 여대생이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이 모두 기억났을 때, 길을 알려 주겠다며 펜션 앞을 함께 걸어 나가는 안느와 여대생이 나누는 비슷한 대화의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서는 짤막한 유레카의 외침이 들리고 그와 동시에 목청을 울리며 쏟아져 나오는 웃음의 맛이 짜릿하다. 물론 자신의 쓸만한 기억력을 격려하는 웃음이 아니다. 홍 감독이 심어 놓은 웃음의 지뢰와 폭탄들이 그 순간 터지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외국인을 처음 만날 때 보여 주는 과도한 친절함과 매번 비슷하게 묻는 질문들을 세 가지 이야기 곳곳에 반복적으로 뿌려 놓은 ‘씨’가 ‘열매’가 되는 순간이다.
스크린 위에서 프랑스 여자가 다른 나라에 와서 겪는 이야기 ‘다른 나라에서’가 흐르고, 관객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감상의 세계라는 ‘다른 나라’가 세워지는 것과 더불어 영화는 또 하나의 ‘다른 나라’를 보여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다기보다 느낄 수 있는데, 이제까지 가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안느의 희망찬 발걸음이 향하는 그곳이다. 분명 숙소인 모항펜션의 간판이 왼쪽에 보이건만, 안느는 어쩐지 마음의 상처를 받은 자신을 도와 준 박숙 교수(윤여정)가 있는 숙소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이 길 끝 어디엔가 저 숲 너머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것처럼 느껴진다. 남편에게, 지인에게 의존하는 삶을 중지시키고 조금은 달라진 스스로의 주인으로 말이다.
영화의 매력은 이밖에도 몇 가지 더 있다. 현재의 문소리는 출산의 흔적을 지우고 날씬해진 여배우의 모습이지만 영화 속 다큐멘터리 감독 종수(권해효)의 아내 문수는 만삭이다. 출산 2~3주 전에 촬영했기 때문인데 여배우의 ‘리얼’ 임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뱃속의 아이는 어느덧 세상에 나와 돌을 앞두고 있다.
여주인공이 외국인이다 보니 영어 대사가 등장하는 것도 묘미다. 어렵지 않은 표현들에 한국식 표현이 함께하니 재미있다. 외국 관객들도 홍상수표 영화의 ‘말맛’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반갑다. 늘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로 등장해 온 유준상이 순박하지만 배움이 짧은 해수욕장 안전요원으로 나와 큰 웃음을 선사하고, 대신 여배우인 정유미가 홍 감독을 대신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신선하다. 홍 감독 영화에 늘 등장하는 염치없이 여자 좋아하고 속 좁은 ‘지질이’도 배우 권해효를 통해 유감없이 구현됐다.
2012 칸국제영화제 수상을 전망케 하는 좋은 징조들이 영화계에서 설왕설래 오가고 있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의 주인으로 한국영화가, 한국감독이, 한국배우가 불려지길 바란다. 두 작품이 동시에 진출하면 상을 안고 돌아왔던 ‘샐리의 법칙’이 이번에도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