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대한민국을 웃기는 힘’. KBS 2TV ‘개그콘서트(개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볼 수 있는 ‘개콘’의 슬로건이다.
선전용 카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개콘’의 위상을 떠올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구다.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이자 연령과 세대, 계층을 초월해 사랑받는 유일무이한 예능 프로그램 ‘개콘’. 많은 사람들은 ‘개콘’이 첫 방송된 1999년 이후 이 프로그램을 보며 지나온 일주일의 피로를 풀고 다가올 일주일을 버텨낼 힘을 얻고 있다. ‘개콘’은 13년 동안 ‘대한민국을 웃기는 힘’이었다.
만약 TV가 아닌 방청석 맨 앞자리에서 ‘개콘’을 관람하고 싶다면 당신은 두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두 구멍은 각각 행운과 끈질긴 노력이 있어야 통과 가능한 작은 구멍이다.
첫 구멍은 방청권 확보 전쟁. 1장당 2명이 입장 가능한 방청권은 매주 약 500장 배부되는데, 이 방청권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KBS에 따르면 ‘개콘 방청권’을 신청하는 사람은 매주 2만∼3만명 수준. 즉, 최고 60대의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방청권을 손에 쥐었다 해도 앞자리 방청석을 차지하려면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방청권엔 좌석번호가 없다. 대신 ‘당첨자’들은 나중에 입장순서가 적힌 번호를 받는다. 이 번호는 녹화 당일(매주 수요일) 오전 9시30분, 서울 여의도 KBS 신관 공개홀에서 방송사 직원이 적어준다. 선착순으로 번호를 적어주니 앞자리에 앉을 요량이면 적어도 이른 새벽 여의도에 도착해야 한다.
◇‘개콘’의 힘은 무엇인가=지난 4일 오전 8시쯤 찾은 KBS 신관 공개홀 앞은 이 같은 난관을 돌파해낸 시민 100여명으로 북적였다. 이들은 방송사에서 마련한 간이의자에 앉아 대망의 ‘9시30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석 앞자리에 앉은 사람일수록 인터뷰 청하기 곤란할 만큼 피곤한 모습이었다.
서울 신도림동에서 온 여대생 임현주(20)씨도 그들 중 하나였다. 언제부터 대기했는지 물으니 밤 12시부터 기다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앉은 자리를 보니 그는 3번째로 일찍 온 대기자였다. “앞자리에 앉아 생생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어요. TV로 보는 거랑 직접 보는 건 다르잖아요.”
매주 수요일 벌어지는 이런 진풍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개콘’이 첫 방송된 건 1999년 9월 4일. 숱한 개그 프로그램이 낮은 시청률로 고전하다 폐지됐지만 ‘개콘’만은 13년간 건재하다. 6일 시청률 조사기관 TNmS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지난 10년(2003∼2012년) ‘개콘’ 시청률은 거의 매년 20% 안팎이다. 방청권 구하기 전쟁은 이러한 인기가 빚어낸 한 현상일 뿐이다.
제작진은 ‘개콘’의 장수 비결을 우선 체계화된 시스템에서 찾는다. ‘개콘’에 고정 출연하는 개그맨은 70∼78명. 제작진은 이들과 함께 수요일은 녹화, 목요일은 새 코너 회의, 금요일은 아이템 회의, 월요일과 화요일엔 리허설을 한다. 리허설에선 방송에 내보낼 코너를 가리는 ‘심사’가 이뤄진다.
서수민(40·여) PD는 “신인들을 훈련시켜 계속 키워낸 시스템도 주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KBS 공채 개그맨만 출연하는 게 ‘개콘’의 불문율처럼 돼 있어요. 이들은 매일 ‘연습실’로 출근해 제작진과 훈련하고 연습합니다. 우물을 우리가 직접 파서 계속 새 물을 얻는 시스템인 거죠.”
케이블 채널 tvN에서 ‘코미디빅리그’를 연출하는 김석현(41) PD는 “오랫동안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 위기를 감지하고 미리 극복해내는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고 평했다. 김 PD는 2004∼2010년 ‘개콘’ 지휘봉을 잡아 ‘개콘’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다. “KBS는 코미디의 역사가 단절된 적이 없어요. 그렇다보니 인재들이 몰리고 위기관리능력도 갖추게 된 것 같아요.”
◇‘개콘’의 미래, 낙관할 수 있나=코미디 프로그램 중 독보적 입지를 구축한 ‘개콘’이지만 최근 들어 프로그램의 질이 떨어졌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배우나 가수들이 영화나 음반을 홍보하기 위해 출연하는 일이 잦은 데다 ‘애정남’ ‘비상대책위원회’ 등 인기 코너가 빠진 자리를 꿰찬 새 코너들은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장기간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던 ‘개콘’은 2주 전부터 장동건 김하늘 주연의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밀리고 있다.
하지만 ‘개콘 위기론’을 말하는 건 성급하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13년 장수하며 쌓인 프로그램의 역량이 만만찮다는 게 이유다. 대중문화평론가 하재근씨는 “제작진과 출연진이 새로운 개그를 개발하는 노력만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코미디 장르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브랜드 가치가 있는 ‘개콘’이 힘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