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지난 7일 종영한 SBS 월화극 ‘드라마의 제왕’은 한 편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방송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내 화제가 됐다. 특히 첫 회에서는 간접광고(PPL·Product Placement)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비중 있게 다뤄 눈길을 끌었다. 극에서 드라마 제작자 앤서니 김(김명민)은 작가 정홍주(서주희)를 상대로 최종회 방영을 앞둔 작품에 PPL 상품인 오렌지 주스를 등장시킬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정홍주는 앤서니 김의 요구를 거절한다. 엄숙하게 진행되는 스토리에서 느닷없이 주스가 출현할 자리는 없다는 항변이다.
“주인공이 복수하고 나서 우아하게 죽는 신이야. 거기서 갑자기 오렌지 주스를 먹는 게 말이 돼?”
“정 작가, 지금 내 몸엔 노란 피가 흘러. 주인공한테 오렌지 주스 먹이는 게 그렇게 힘든가? 그 주스 한 잔에 돈 3억이 걸려 있어. (대본에) 당장 그 노란색 오렌지 주스를 써. 이건 부탁이 아니야. 당신을 고용한 오너의 명령이야!”
정홍주는 앤서니 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 고집대로 대본을 써서 보낸다. 하지만 앤서니 김은 보조작가 이고은(정려원)을 꼬드겨 정홍주 몰래 최종회 대본에 ‘오렌지 주스 PPL’을 삽입한다. 결국 주인공은 주스 박스가 쌓인 물류창고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인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엔 뜬금없이 호주머니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낸다. 주스를 한참 동안 응시하는 주인공. 그는 죽음을 앞두고 마치 CF 모델처럼 맛있게 주스를 마신다.
# PPL에 멍든 브라운관
‘드라마의 제왕’에 나온 에피소드는 우리 드라마의 맨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극의 전개와는 상관없는 상품이 불쑥 튀어나오는 일이 요즘 안방극장에선 비일비재하다. 개연성 없는 PPL의 등장에 가끔은 씁쓸한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가령 지난가을 방영된 KBS 2TV 멜로극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를 보자. 이 작품 8회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던 여주인공 서은기(문채원)가 홀로 바다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닷가에 서더니 갑자기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화면엔 휴대전화 브랜드가 노출된다. 서은기는 이 기기의 연속 촬영 기능을 이용해 느닷없이 바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스마트폰 기능을 선전하는 모습으로밖에 안 보이는 장면이다.
비슷한 사례는 다른 방송사 드라마에서도 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상반기 방영된 MBC 수목극 ‘더킹투하츠’는 ‘던킨도너츠’로 불리곤 했다. 등장인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이 브랜드의 도넛을 먹는 데다, ‘더킹투하츠’와 ‘던킨도너츠’ 두 단어의 발음까지 유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톱스타 장동건(41)의 브라운관 복귀작으로 화제가 된 SBS 주말극 ‘신사의 품격’도 마찬가지다. ‘꽃중년’ 4인방의 로맨스를 그린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거의 매회 특정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카페 매장과 로고 등이 꾸준히 화면에 잡힌 건 불문가지다.
최근엔 드라마가 아닌 ‘무한도전’(MBC) ‘개그콘서트’(KBS2) 등 여타 장르의 프로그램에서도 PPL이 등장하는 일이 허다해졌다. 지난달 31일 열린 SBS 연기대상에서는 시상자들이 하나같이 무대에서 스마트폰을 건네받아 휴대전화 화면에 적힌 수상자 이름을 호명했다. 개그맨 이수근(38)은 당시 시상자로 무대로 올라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시상식 무대에서 스마트폰이) 별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큰 지원을 하신 모양입니다.”
# PPL 합법화 3년… 날로 커지는 PPL의 세계
PPL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건 2010년 1월 방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부터다. 음성적으로 형성된 간접광고 시장을 양지로 끌어내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것이 시행령 개정의 취지였다.
이후 3년이 흐른 현재, PPL은 간접광고가 금지된 보도 및 어린이 프로그램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방송 제작에서 필수요소가 됐다. 11일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 따르면 2010년 지상파 방송 3사의 간접광고 수입은 29억7000만원이었지만 지난해엔 262억4000만원으로 2년 만에 8.8배나 증가했다.
그렇다면 PPL 단가는 어떻게 매겨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출 수준과 빈도, 시청률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예컨대 노출 수준만 보더라도 ①제품의 단순 노출 ②등장인물의 제품 사용 ③등장인물이 제품 사용법을 설명하는 식의 에피소드 삽입 등으로 세분화돼 가격이 책정된다.
방송업계 관계자 A씨는 “미니시리즈에서 주인공 직업군(群)까지 PPL 업체와 동일하게 설정되는 ‘메인 PPL’의 가격은 총 5억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 아웃도어 업체가 방송사와 PPL 계약을 맺었다고 가정할 때, 주인공이 이 업체 사장으로 등장해 지속적으로 회사 이름 등이 화면에 노출되면 광고료도 비싸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정도 가격 역시 예시일 뿐이다. A씨는 “최근 톱스타가 출연한 블록버스터 드라마에서는 ‘메인 PPL’ 단가가 10억원이 넘은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드라마 한 편당 PPL이 많을 땐 10개 넘게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방송사가 간접광고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수입을 올릴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타임슬립(Time Slip·시간여행) 드라마가 유행한 배경에도 PPL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극의 경우 PPL이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방송사들이 일부러 타임슬립이라는 수단을 가미했다는 것이다.
광고업계에서도 PPL은 중요한 광고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광고업계 관계자 B씨는 “광고주들이 직접광고보다 PPL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요즘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IPTV의 다시보기 서비스 등을 통해 TV를 보는 사람이 늘고 있잖아요? 이 말은 프로그램 앞뒤에 붙는 직접광고는 안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얘기죠.”
# ‘PPL 공해’ 막을 수는 없나
이처럼 방송업계나 광고업계에서 PPL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성장했다. 하지만 맥락과 상관없는 노골적 PPL이 범람하는 현 상황은 시청자들에겐 불쾌지수를 유발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지상파 방송 3사가 광고 관련 심의 규정을 위반해 제재조치 및 권고를 받은 건수는 2010년 14건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59건으로 치솟았다.
전문가들은 PPL이 남용되는 분위기가 계속되면 방송 콘텐츠의 질적 저하까지 초래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광고주 입김에 콘텐츠 내용이 좌지우지되고, 나아가 방송업계가 자본 논리에 종속되는 경향이 심화될 가능성을 걱정했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PPL이 과도하게 등장하다보니 어떤 때는 드라마가 아닌, 스토리텔링 기법이 도입된 광고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드라마가 영상 예술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당국의 규제가 더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당국이 PPL 문제에 대해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시행령에 따라 PPL이 합법화됐어도 모법(母法)인 방송법 73조엔 방송과 광고가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며 “시행령을 근거로 이 문제를 소극적으로 다루려 하지 말고 모법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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