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청와대 신임 비서실장, 대통령 옷 주머니에 〃멋을 아는 분〃

[전정희의 시사소설] 청와대 신임 비서실장, 대통령 옷 주머니에 〃멋을 아는 분〃

기사승인 2013-08-05 13:42:01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원삼에 주머니를 달아? 웬 해괴한 일이래? 별일이다 얘.”

궁녀들은 궁관 사제(司製)의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다. 왕실 사람들의 의복을 재봉하는 이들은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이나 수렴청정 하여 요즘으로 치자면 대통령인 셈)가 입는 원삼(圓衫)에 주머니를 달면서 그 용도를 몰라 의아해 했다.

원삼은 왕비나 정4품 이상의 후궁만이 입을 수 있는 예복이었다. 원삼은 양쪽 깃이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고 옷자락 양 옆이 트였으며 앞자락이 뒷자락 보다 짧았다. 소매는 색동과 한삼(汗衫)을 달아 그 화려함이 눈이 부셨다. 여기에 가채까지 쓰면 위엄이 확 살아났다.

한데 문정왕후는 조선 개국 이래 한 번도 틀이 바뀐 적 없는 예복 원삼에 주머니를 달아 즐겨 입었다. 특히 문정왕후의 예복은 선대의 그 어느 왕비보다 화려했다. 하지만 예복을 담당하는 내명부 사제와 그에 배속된 궁녀들은 일거리가 넘쳐 죽을 맛이었다. 문정왕후가 하루 두 차례 예복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연두색 비단 옷에 주머니 댄 옷 입고 나타난 문정왕후

팔월 닷새였다. 문정황후는 아들 명종을 시켜 승정원 도승지(청와대 비서실장 격) 및 승지(수석)를 임명하는 날이었다. 이날 조회는 사시(오전 9~11시)에 열렸다.

이틀 전 사림(야당)과 백성들이 광화문 앞에 엎드려 재위 8개월 만에 숨진 인종의 죽음에 의금부가 깊이 개입한 의혹이 있다며 그 진상을 밝혀 달라는 소를 했으나, 당권파인 소윤의 윤원형(문정왕후의 남동생) 등은 명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내쳤다. 한성판윤은 연이은 광화문 앞 시위에 관한 장계를 올렸으나 되레 윤원형의 분노만 샀다.

그렇다고 백관들의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의적 임꺽정이 황해도 지방에 출몰하여 학정과 수탈에 저항했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설쳐 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째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했다.

소위 "위로는 여왕이 날뛰고,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라며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양재벽서 사건이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들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명종은 “네가 누구 때문에 임금이 됐느냐”는 어머니의 호된 질책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를 아는 백관들은 명종의 윤허보다 문정왕후의 발 뒤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조회는 용상의 명종과 그 아래 백관들이 조용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려 어전은 눅눅하고 또 아침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문정왕후는 “대왕대비마마 납시오”라는 내관의 고(告)가 있은 후 연두색 비단의 원삼을 입고 천천히 들어섰다. 어전 마루바닥을 훑고 지나는 금박 끝단의 원삼 복색은 둥근 용보(왕가임을 상징하는 용무늬)로 더욱 빛났다. 집권 후 혈색이 날로 좋아지는 문정왕후의 얼굴은 옷에 맞춰 희색이 만연해 어전을 압도했다.

그 가운데서도 신하들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당의(치마) 옆 붉은 주머니였다. 연두색에 붉은 주머니는 두드러졌다. 신하들은 조회 때마다 새로운 색으로 모양을 낸 당의에 너나없이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관들, 화려한 의상 입고 등장한 대통령에 기립으로 맞아

명종과 만조백관 모두가 재빠르게 일어나 예를 표했다. 문정왕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용상 뒤발로 가려진 또 하나의 용좌에 앉았다.


문정왕후의 출행에는 반드시 사제 여가부가 뒤따랐다. 여가부는 종7품에 불과한 궁녀 출신의 궁관이었다. 그런데 여가부가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조회에 참석했다. 그녀의 임무는 문정왕후의 복색을 챙긴다는 것이었는데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복색만이 아니라 요승들을 궐내 불러 들여 문정왕후가 점을 보게 만들기도 했다.

명종의 내관은 여가부의 요망한 짓이 싫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여가부는 어전 기둥 뒤에 몸을 반쯤 가리고 어전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왕후가 언제 부를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그를 두고 백관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신임 비서실장, 좌파 때려 잡는데 일가견

이날 조회에서 의금부 전 당상관 김거제가 승정원 도승지로 낙점됐다. 그는 중종 때 사림의 개혁세력 조광조 일파를 역모로 몰아 참수하고 그 공으로 승승장구했다. 이날 같이 임명된 승지 4명은 윤원형이 문정왕후에게 천거한 사람들이었다.

조회가 끝난 후 문정왕후는 도승지 김거제를 불러 백관 앞에서 예를 갖추게 했다. 왕후는 아들 명종 임금을 의식했던지 그 자리가 다과회임을 애써 강조했다. 문정왕후가 말했다.

“어진 임금 밑에 이렇게 출중하신 분들이 있다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국사가 개국 이래 가장 원만히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경들의 노고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대신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제에게 시켜 조촐한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앞에 놓인 다과를 드시면서 말씀 나누시지요.”

한데 우의정 윤원형이 주책없이 말머리를 치고 나왔다.

“이 모든 것이 대왕대비마마의…”

그리고 아차 싶었던지 “주상 전하와 대왕대비마마의 성은이옵니다. 신임 도승지는 형조 판서를 지낸 인물로 좌당(좌파)을 때려잡는데 그 누구보다 탁월하므로 앞으로 사림 등에 의한 정국 경색이 없을 줄 아옵니다”라고 이었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이 먼저 나선 것이 쑥스러웠던지 말머리는 돌렸다.

“도승지께서도 한 말씀 하시지요?”

그때 김거제는 히여물그레한 얼굴에 인중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대감들을 휘 둘러 본 뒤 한마디 했다.

“이런 다과 자리에서 무거운 얘기해서야 되겠습니까? 대왕대비마마의 은덕과 전하의 깊은 한마디가 만백성에게 광명으로 자리하는 것을 느끼고 삽니다.”

백관 가운데 그의 뼈 있는 말이 거슬렸는지 헛기침을 해대는 자들이 있었다. 김거제는 일별해 그들을 머리 속에 넣었다. 그가 말한 ‘전하의 깊은 한 마디’는 사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 명종을 우습게 여기는 얘기였다. 문정왕후만 바라보는 그로선 당연했다.

비서실장, “대통령 복색, 지혜가 담겨”

김거제는 한 마디 더했다.

“요즘 대왕대비마마로 인해 사대부집 아녀자들 사이에 ‘주머니 바람’이 일고 있다 하옵니다. 제 내자도 근자에 보니 주머니 달린 당의를 입습디다. 왕후께서 천자의 나라 명의 명풍(明風)을 받으신 것이 온데 12폭 치마마다 형형색색의 주머니를 대지 않은 처자들이 없습니다. 왕후께서는 참으로 의복 하나에 까지 천자의 나라를 섬기는 지혜를 가졌사옵니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그렇지요, 그렇지요”하는 후렴이 이어졌다. 그리고 너도나도 제 처와 제 딸들을 들먹이며 ‘북경풍 명품 주머니(베이징 트렌드)’를 얘기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주머니 덧댐은 명풍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문정왕후가 권력을 잡기 전 남편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소윤의 정적 당인 대윤 윤임의 여동생), 폐출된 정비 단경왕후 등의 등쌀을 이겨내면서, 살아남았을 경우 제거해야할 대상 등을 담은 치부책 쓰는 습관이었다. 문정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다.

그 치부책 습관을 하루아침에 버리기 어려워 사제 여가부를 시켜 원삼마다 소책(메모장)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를 달아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을 두고 여가부가 “요즘 명나라 황실에서 유행하는 복색”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종국에는 문정왕후에 의해 조선 팔도 사대부 아녀자들에게 퍼지게 된 것이다.

김거제는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한 술 더 떴다.

“이번 사행사(명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게 시켜 사해(四海) 최고의 주머니 원단을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작은 주머니이나 대명을 섬기는 신하국으로서의 예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이 자리에서 명종은 귀와 입이 없는 사람처럼 어머니를 향한 용비어천가를 못들은 척 했다. 다만 그들의 얘기를 마음 속 주머니에 담았다.

“내 수렴청정이 끝나면 저 놈 김거제와 윤원형부터 내치리라”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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