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대통령, '사초' 여론 반영 국가정보원장 파면

[전정희의 시사소설] 대통령, '사초' 여론 반영 국가정보원장 파면

기사승인 2013-08-07 15:14:01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아이, 까실하옵니다. 천천히, 천천히 들어오셔요.”

전라도 장흥기생 매월이 까탈을 부렸다. 상복을 입은 남정네를 받아들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묘한 흥분에 눈을 흘기면서도 사타구니에 닿는 삼베의 까실까실함을 즐겼다. 거친 사내의 손에 걷힌 치마가 가슴께 까지 올라와 있었다.

“영감, 남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이려오? 저야 영감 모셔 더 없이 좋으나 행여 입소문 날까…”

“허, 고년 걱정도 팔자로구나. 예서 한양이 어디냐? 천릿길 아니냐? 내가 누구냐? 천하의 남국정이 아니냐? 대왕대비 상중이라 하여 애 안 낳고 사느냐? 사내들끼리는 상중에 병풍 뒤에서 하는 것을 최고로 치느니라. 죽은 자도 하고 싶어 벌떡 일어나지 않겠느냐.”

남국정은 그러면서 매월의 어깨를 아래로 잡아당기며 상복도 벗지 않은 채 골진 곳으로 양물을 밀어 넣었다. 매월이 아 하고 신음을 냈다. 하지만 정작 남국정은 까실한 삼베가 양물 끝에 닿아 통증을 느꼈다. 으 하고 몸을 떨었으나 것 또한 나름 묘미가 있었다. 개구리 자세로 아랫배에 힘을 주어 매월을 밀어붙이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냐? 한양에서 수 천리 떨어진 장흥 아니냐? 갯가 미색이 모두 내 것이면, 바로 내가 왕 아니냐. 왕이 뭐 별거냐? 맨 날 그게 그 짝인 궁녀들 엉덩이 끌어 당겨봐야 몸만 상한다. 안 그러냐 매월아?”

“영감 이년 죽습니다. 짓누르지만 말고 상복 벗어버리소서. 어서요.”

후끈 몸이 달은 매월이 급하게 최의(상복 상의)를 풀어헤치며 남국정의 가슴을 탐했다.

“합환은 상중 병풍 뒤에서 하는 게 최고니라”

남국정이 전라도 장흥 땅까지 내려 온 것은 온 나라가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전라도 진휼사(흉년 시 백성 구제를 위해 조정에서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아치)로 남국정을 보냈다. 나주부를 거쳐 장흥까지 오는 동안 흉년과 역병으로 죽은 시신이 길가에 즐비했다.

산발한 백성은 그의 행차대열에까지 아귀처럼 다가들어 구걸했다. 나졸들이 육모방망이를 휘둘러대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가 전라도에서도 왜구 출몰이 잦은 장흥까지 간 것은 순전히 매월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장흥현감이 말하길 “매월이는 왜년의 딸이라 남다르옵니다. 부디 행차 하시어 해산물을 드시고 매월이를 품어보소서”했다. 귀가 번쩍 뜨인 남국정은 불원천리 마다 않고 말머리를 돌린 것이다.

장흥현감이 말한 매월이는 장흥에서 태어난 왜년이었다. 왜구들이 대마도를 노략질 하면서 대마도 번주의 딸을 납치해 해적선에 싣고 다녔는데 바로 그 딸이 조선 수군에 잡혀 도만호(都萬戶·수군 종3품 무관) 첩이 됐고, 그 사이에서 매월이 태어났다. 근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 육군참모총장, 여자에 빠져 ‘사초’ 빼돌려

그런데 남국정이 진휼사로 내려오는 길에 세조의 정비, 곧 정희왕후가 온양에서 온천 목욕을 하다가 호흡 곤란을 일으켜 숨을 거두었다. 국상이었다. 남국정은 즉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북망한 후 곡을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이 더위에, 이 답답한 상복 입고 3년 상을 치러야 한단 말인가?’

남국정은 배재서원을 마치고 무과에 급제해 오위도총부 도총관(육군참모총장 격)을 지낸 무인이었다.

선왕 성종 때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진보)을 두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천자의 나라를 능멸하고 배향하기를 꺼려하니 깡그리 잡아 참수해야 한다”는 강경한 발언으로 훈구(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사림은 “조·명연합군(한미연합사 격) 총관을 겸하더니 명나라 장수 졸개가 됐다”고 비난하며 맞섰다.

그는 결국 사림 세력을 통해 훈구파를 견제하려한 성종의 뜻과 맞물려 도총관직에서 밀려나 진휼사라는 한직으로 물러나게 됐다. 성종은 자신을 수렴청정한 정희왕후 계열로 파악, 그를 내친 것이다.

그는 진휼사에서 돌아 온 후 무인에게는 수모나 다름없는 실록청(국가기록원) 당상관이 되어 사초를 정리하는 신세가 됐다.

“사대하지 않는 자들은 빨갱이다”

그러다 무인 체질인 연산군이 권좌에 오르자 어떻게든 출세해 볼 요량으로 시절을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사초를 정리하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작성한 ‘성종실록’ 사초를 점검하면서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이 잘못됐음을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발견하게 됐다.

‘이거다! 이거면 김종직 잔당 세력을 한 번에 몰아낼 수 있다. 사대하지 않으려는 자들과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있단 말인가? 내게 하늘이 기회를 주셨도다.’

한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노회한 남국정은 잇속이 따로 있었다. 자신의 비행을 기록한 사초 대목 때문이었다.

‘김일손 이놈이 수사관(修史官·사초기록관)이 아니라 좌당(좌파) 아닌가? 내가 기생 좀 가지고 놀았기로서니 그걸 사초에 넣는단 말인가? 이 자가 제 정신인가? 네 이 놈을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

남국정은 사초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장흥에 갔을 때 정희왕후 상중 매월과 놀아난 일을 낱낱이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하여 김일손이 남국정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관으로서 올라온 상소를 정리한 죄 밖에 없었다.

남국정은 검열(檢閱) 관원에게 시켜 세검정으로 가서 사초를 씻어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들이 씻은 자료를 가지고 오자 그들 모르게 장흥 기생 매월 부분을 도려냈다. 그리고 제책을 다시 했다.

사초를 야사 수준으로 안 前 육참총장

이튿날. 남국정은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관련한 사초를 들고 유자광에게 달려갔다. 유자광은 남이를 제거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운 정계 원로였다.

더구나 유자광이 성종 재위 시 처가가 있는 경상도 함양현감으로 갔을 때, 제 흥에 겨워 시를 한 수 짓고 이를 동헌 현판에 걸어 놓았는데 후임인 김종직이 그 현판을 떼어 불살라 버리자 극도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남국정은 유자광에게 그간의 사초 관련 일을 보고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얘기는 쏙 빼버렸다. 그렇다고 그의 계교를 모를 정객 유자광도 아니었다. 그는 사저를 나서는 남국정이 돈 궤짝을 집사에게 맞기지 않고 떠났다면 함께 엮어 버릴 생각이었다.

왜냐면 남국정이 행한 사초 공개는 임금이라도 볼 수 없는 나라의 일급 기밀문서 공개였기 때문이다. 국휼로 다스리자면 능지처참 감이었다. 사관은 자신의 사관(史觀)이 있다하더라고 사실 그대로를 적어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남겨야할 중요한 직책이었다.

남국정은 실록을 야사 취급하며 이리저리 빼돌렸다. 명을 사대하지 않는 임금이나 신하는 전부 좌당이고, 참수해야할 대상으로 봤기 때문이다.

대통령, 사초보고 “국기를 뒤흔드는 일”

그날 오후. 유자광은 연산군을 독대했다. 편집된 사초의 ‘조의제문’을 본 연산군은 포악한 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임금에 반한다’ 이 한 대목에 광분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간원을 비롯한 언론을 싫어했다.

“사초에 이 따위 게 쓰여 있다면 국기를 흔들고 역사를 지우는 일 아니오! 김종직 잔당을 모조리 잡아 참수하시오.”

이른바 피의 무오사화(戊午史禍)였다. 이 사화로 의식 있는 조선의 사림은 씨가 말라 버렸다.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이 능지처참됐고 정여창 김굉필 등이 삭탈관직 되거나 귀양 보내졌다.

반면 유자광은 이 일로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했다. 훗날 백성들이 그를 ‘천하의 간신’으로 불렀다.

청와대서 부르기만 기다리며 제복 입어본 남국정

개국이래 사초를 자기 이익에 따라 최초로 ‘폭로’한 남국정은 유자광과 연산군이 불러줄 날만 꼽고 있었다. 입궐 준비에 바빴다.

“부인, 이 전립(戰笠·군복의 모자)이 잘 어울리오? 임금께서 나를 다시 도총관으로 부를 것이오. 내가 비록 칠십에 가깝다 하나 나 아직 죽지 않았소. 사초를 임금께 바친 것은 순전히 군주를 향한 일편단심이었을 뿐이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도총관만 된다면 그 왜년 매월이를 불러 유자광 대감 첩으로 바치리라’고 다졌다.

그가 그렇게 이 전립, 저 전립 쓰고 있을 때 부하 봉교가 헐레벌떡 들어섰다.


“나리 이를 어쩝니까? 이걸 보소서.”

‘명, 당상관 남국정은 파면한다’

어명이었다. 그는 공개하지 않아야 할 사초를 사심에 의해 공개한 후 들끓는 민심을 몰랐던 것이다. 그 민심을 연산군과 유자광 마저도 막을 수 없어 남국정에 대한 토사구팽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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