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1.
사간원 대사간 양겸은 풍류모임에 자주 나갔다.
사간원(지금의 경복궁 옆 사간동)을 나서 구종 하나를 데리고 쉬엄쉬엄 조랑말을 몰아 인왕산 밑 옥류동 계곡을 즐겨 찾았다. 그 무렵 양반네들이 즐기는 가장 운치 있는 놀이가 풍류모임이었다.
양겸은 요즘 승정원 도승지 홍국영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홍국영은 열세 살 누이동생을 정조의 빈으로 들여보낸 후 세도 권력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사간원(감사원 격) 업무에 속하는 전랑직 인사권마저 홍국영이 좌지우지했다. 홍국영이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 것은 선왕 영조 임금 시절 벽파가 세손(정조)까지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이를 막아낸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홍국영은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라는 보직을 맡고 있어 가능했다.
‘홍국영이 많이 컸구나. 네가 내 목에 칼을 겨눌 줄은 몰랐다. 세상 이치가 그런 줄은 알았다만 동문수학하던 네가…’
양겸은 옥류동천 석교를 건너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입추로 들어서면서 골바람이 촘촘한 흑사모 사이로 닿는 느낌이 달랐다.
2.
“어디로 가더냐?”
홍국영이 양겸의 행선지를 서리에게 물었다.
“옥류동쪽으로 향했습니다.”
“옥류동이라…누가 참석한다 하더냐?”
“전 한성 판윤 이현박과 그의 수하이옵니다. 공조 판서를 지낸 이은평이 주도한 모양입니다.”
“한심한 자들 같으니라구…지들이 저질러 놓은 청계천 녹조 때문에 도성이 난리인데 계류에서 시가나 흥얼거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홍진을 몽땅 우리에게 뒤집어 씌워놓고 풍월하겠다 이거지? 더구나 대사간이란 자가 세상 바뀐 지 모르고 자리 꿰차고 앉아 박쥐처럼 이리저리 붙어 제 잇속이나 채우고…기녀 옆에 끼고 거문고 뜯어보라지.”
3.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지락을 모르는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송죽 울울한 곳에 풍월주인 되었구나’
기녀 유환경의 시가는 옥구슬 쟁반에 구르듯 낭랑했다. 소리가 잦아들면 물소리가 커졌고, 물소리가 잦아들면 소리가 커졌다. 삼남에서 뽑아 올린 최고의 기녀답게 미색 또한 풍류회 참석자의 혼을 뺐다.
그녀가 일창을 끝내고 거문고를 양겸에게 넘겼다.
“대감, 이 즐거운 자리에서 왜 이리 샌님이시오니까. 하긴 그게 대감의 매력이긴 하옵지요. 대감께서 한 곡 들려주소서.”
양겸은 갑작스런 청에 당황했다. 그리고 기분이 나빴다.
‘어허. 기녀마저 나를 능멸하려 드는구나. 기녀 몸정이야 방문 닫으면 그만이라지만, 이년이 보름 전 코맹맹이 소리로 내게 요살을 떨더니…영의정 대감 행하 바라고 저리 유세인가.’
양겸은 이런 생각을 하며 유환경으로부터 거문고를 건네받았다. 도포자락을 뒤로 획 제치고 무릎 위에 거문고 용두를 놓았다. 그런 양겸을 보고 이현박이 가느다란 눈초리를 한 채 특유의 쇳소리로 말했다.
“‘상춘곡’이 좋겠소. 동기인 홍국영이 세상이니 그가 봄날 일 것 아니오. 대사간께서는 경연에서 녹양방초 실비 속에 푸르다고 헌사했다는 얘기 들었소. 새 임금이 앉았으니 팔도가 녹양방초지요.”
양겸은 흠칫 놀랐으나 표정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현박은 영조때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에 임명됐다. 집권당 노론의 좌장으로 최고 실력자였다. 청계천준천은 그가 한성 판윤을 지내면서 이뤄졌다. 양겸은 그의 천거로 임명됐다. 당시 이현박은 사실상 허수아비 임금이었던 영조에게 낙점을 강요해 도성 밖 칠패의 세도가 중심인물 양겸을 대사간으로 임명했다.
양겸이 처세에는 밝지 않았으나 충성을 다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양겸은 그에 부응이라도 하듯 청계천 보설치(4대강 개발 격)와 관련해 무탈하다는 감사보고를 좌당에 보란듯이 내놓기도 했다.
‘남인과 소론(야당)이 제기하는 녹조로 인한 악취는 도성 백성의 위생 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 보 축조에서 오는 이상은 아닙니다. 분뇨나 설거지물을 청계천으로 마구 버리는 백성이 문제이옵니다.’
이런 내용의 사간원 감사보고가 이현박에게 올라왔고, 이현박은 이를 상참에서 공표했다.
그런데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양겸은 돌변했다.
‘중학천과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수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준천과 보 공사를 진행하여 민생을 어지럽혔다.’
보 설치를 하면서 이현박이 시전 상인과 결탁했다는 내용도 있었으나 사간원 낭관 하나가 이를 미리 알고 이를 이현박에게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어전 조회 보고는 막을 수 있었다.
4.
양겸이 거문고를 타는 동안 이현박은 유환경을 허벅지에 앉히고 희롱했다. 흐벅진 그녀의 허리를 뒤로 껴안아 앉히니 항아리 얹어지듯 맞춤으로 들어왔다. 이현박은 손을 뻗어 이환경의 무지기치마를 헤치고 보드라운 맨살을 만졌다. 코끝은 가체에 뿌린 동백향이 자극했고, 양물 끝은 천도 같은 음골이 자극했다.
또 어느새 허리가리개를 빼버렸는지 봉긋한 가슴이 짧은 저고리 사이로 삐져나와 그의 눈을 자극했다.
‘풍류로다 풍류로고’
이현박은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먼 산을 보며 흥얼거렸다. 그때 이환경이 상반신만 돌려 접문하려 했다. 입술과 입술이 바짝 닿자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영의정 대감 분위기 깨지 마소서. 대사간도 먹고 살려고 저러는 것 아녀요. 먹물 든 사람들이야 제 살길 터놓고 언제든 달아날 문고리 잡고 있는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녁 같은 이들이 또 있는 줄 아시우. 사내놈들 의리야 주인 앞에서나 똥개 꼬리 흔들 듯 하지 새 주인 나타나면 바로 상갓집 개 되기 마련 아니우.”
그러면서 혀를 쑥 내밀어 이현박 입에 넣었다. 달진 혀를 한 참 빨던 이현박은 “허허허, 기생년 의리야 내가 행하 돈만 많다면 죽을 때까지 이어지겠지. 그 행하 돈이야 시전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백년은 쓰겠구나. 비록 네 년이 입만 살아 의리라고는 했으나 그 입소리만큼은 노랫소리와 진배없구나…헙”
이현박이 일순 열락의 얼굴이 됐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이환경이 눈을 흘깃하더니 엉덩이를 살짝 들어 겉치마와 속치마를 열면서 이현박의 양물을 잡아 이끌었기 때문이다. 청금상련(廳琴相戀)이었다.
5.
양겸은 그들의 수작을 눈치 못챈척 ‘하여가’를 탔다. 또 다른 기녀 몇이 장단을 맞췄다. 비녀들은 계곡 저편을 부지런히 오가며 음식을 날랐다.
거문고를 타며 양겸은 후회했다.
‘목침 옆에 두고 서책이나 읽을 것을 괜한 욕심 부려 사람꼴 우습게 됐구나. 이 무슨 망신인고.’
그날 풍류회는 양겸에 대한 이현박의 마지막 경고 같았다. ‘청계천 보 문제를 가지고 네가 더 헛소리를 하면 양씨문중 칠패 상권 비리를 터트려 버리겠다’는 묵언이 느껴졌다.
칠패(서소문 일대)는 한강 연안의 물화가 도성으로 풀리는 거점으로 사상(私商)들의 들고남은 양씨 세도에 달려 있었다.
6.
옥류동 풍류회 다음날 조참에 나간 양겸은 좌우대신들이 있는 가운데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소인은 대사간으로 양 임금께 공론을 반영하고, 국정을 살펴 언론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 청계천 녹조 공론에 대한 시비를 제대로 처리, 공명정대함으로 일관했나이다. 청계천 보 설치가 총체적 부실 공사라는 결론에 이르렀음에도 좌우당 대신들이 이를 믿지 아니하고 공세를 계속해 불민한 제가 낙향키로 결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신들이 술렁댔다. 좌당이든 우당이든 양겸의 마지막 처세에 실망하여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붙는 편한 처세였다.
7.
홍국영은 이날 양겸을 두고 '호질(虎叱)'이라 규정했다.
도학에 이름난 북곽선생은 청렴한 선비 명성과 달리 과부와 정을 통하고 어느 날 과부 아들에게 적발되어 도망가다 똥통에 빠졌다. 북곽선생이 간신히 똥통을 빠져 나오긴 했는데 그 앞에 호랑이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한데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며 잡아먹지도 않았다. 위선자였기 때문이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jhjeon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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