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1.
배우 설경구는 ‘운이 좋다’. 추석 앞두고 개봉한 코믹 ‘스파이’가 9일 개봉 4일 만에 100만명 관객을 돌파하며 대박 조심을 보이고 있다.
‘스파이’는 설경구에게 간단치 않은 영화였을 것이다. 출연작 ‘공공의 적’ ‘오아시스’ ‘해운대’ ‘타워’ ‘감시자들’ 등에서 구축된 엄중한 캐릭터로 ‘스파이’와 같은 코믹물에 도전하기가 말이다. 11년 전 그가 출연한 영화 ‘광복절 특사’와 같은 코믹 장르 도전이었다.
2.
결론은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이다. ‘차돌같이 단단한 눈빛 연기’의 장점을 살려 코믹에 재도전했으나 정장 입던 이가 쫄바지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이번에도 ‘광복절 특사’처럼 조연 덕에 체면 세우게 됐다.
설경구는 이번 ‘스파이’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첩보요원 철수역이 주는 액션신이 없었더라면, 스튜어디스 푼수 마누라 안영희 역의 문소리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빛나는 조연 고창석과 라미란이 없었더라면 우세스러울 뻔했다.
‘스파이’ 대사가 설경구를 코믹 장르로 진입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설경구가 대사를 체화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믹 영화인데 그 코믹 영화의 주연 배우를 보고 관객이 웃지 않는다면 주연 배우는 뭔가 2% 모자라다고 봐야 한다.
3.
감독은 주연 배우를 캐스팅할 때 그 사람의 생활태도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건성건성 놀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스며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사 진지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어느 태도가 좋고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감독이 연기자의 그러한 생활태도를 살펴보고 적역을 골라내는 일, 이것이 감독의 몫이란 얘기다.
설경구의 생활태도는 후자에 가깝다. 눈빛이 강하고, 얘기를 이어갈수록 세포가 굳어 가는 형이다. 이런 설경구를 액션을 중심으로 한 코믹극에 넣어 놓으니 1+1이 되고 말았다. ‘액션’과 ‘코믹’이 따로 논다는 얘기다. 액션은 설경구가, 코믹은 문소리가 주인공이었다.
4.
따라서 감독의 캐스팅 미스다. 어쩌면 미스할 걸 알면서 설경구를 택했을 것이다. 왜냐면 설경구는 ‘스타 마케팅’이 가능해서다. 그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판에서의 다음 작품 등을 고려한 정무적(?) 판단도 캐스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5.
설경구로선 단선 연기가 갖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스파이’ 주연을 수락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월이 갈수록 일정 부분 굳어가는 얼굴 근육선을 살리는 연기력 변신,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이러한 변신이 이루기 위해선 “내 목소리는 가짜”라는 어느 배우의 노력 정도는 뒤따라야 한다. 누가 들어도 달콤했던 목소리의 그 배우. 사실은 자신의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싫어 서울 대학로 연극판과 발성·발음 개인지도를 받으며 맹진한 결과였다고 한다.
6.
‘스파이’는 딱 추석용 코믹 영화다. 남녀노소 두루 웃겨야 한다. 이 영화에서 메시지를 찾으려면 우스꽝스러워 진다. 그렇다면 배우의 코믹 요소를 살리는 배우가 갑이다. 설경구는 주연임에도 갑이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