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애월아, 애월이 게 있느냐? 냉큼 오너라.”
특진관 승지 최명길(고용복지수석 격)이 아침부터 부산했다. 그의 집은 남산이 보이는 북촌 아흔아홉칸이었다. 추석 밑인데도 날이 더워 안채 두고 사랑채 은행나무 평상에서 기침을 한 그였다. 안채에 가봤자 늙은 여편네 잔소리에 골치만 아플 것 같았다.
명길은 십장생 무늬 목침을 베고 잤던 터라 목이 뻐근했다. 자리끼를 마신 그는 평상에 정좌하고 두 손을 비벼 얼굴과 수염을 문지르고 쓰다듬었다.
‘어허, 내가 회춘하는 건가? 젊어 청춘인줄 알았더니 쉰이 넘어서도 청춘이 될 줄 몰랐네. 그 년 참….’
명길은 바지 트임 사이로 삐져나오는 뿌리가 신기해 제 것이 아닌 양 내려 보았다. 나이치고 실했다. 젊은 것이 좋긴 좋았다.
그는 허리를 펴 남산을 바라다보며 시(時)를 가늠하더니 짐짓 여유를 부렸다. 상참(청와대 국무회의 격)까지는 삼각(4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리 생각이 들자 애월이 더 간절해 졌다.
“애월이 오고 있는 게냐?
“예 대감마님, 찾으셨사옵니까?”
“올라와 입궐할 단령 좀 준비하거라.”
애월은 사랑채에 들어 횃대에 걸린 대감의 저고리부터 챙겼다. 어젯밤 저고리 동전을 숯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려 걸어 놓았다. 그때 입궐시 입는 집무복인 감청색 홍단령도 고름 하나 하나 구겨지지 않게 야무지게 다려 놓았다.
명길은 횃대 앞에선 애월을 보고 있자니 트임 사이로 빠져 나오려던 그놈이 더욱 부풀어 괜한 헛기침을 해댔다. 암팡진 애월의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치마 속에서 선을 드러냈다. 운학문이 새겨진 상감청자의 곡선보다도 아름다웠다.
“남산 소나무가 아침 햇살에 쑥쑥 크는 구나. 어이구, 잘 잤다.”
명길은 기지개를 켜며 평상에서 내려 횃대 앞으로 슬그머니 갔다. 그리고 애월을 뒤에서 안았다. 손이 어느새 애월의 저고리 밑으로 가더니 봉긋한 가슴을 쥐고 있었다.
“대감 마님, 이러시면 이년 죽습니다. 안방마님 기침하신 거 보았사옵니다.”
애월이 쩔쩔매며 뒤로 돌아서 명길을 떼 내려 했으나 완력에 꼼짝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명길의 손이 가슴 한쪽을 놓더니 애월의 주홍치마 아랫단으로 내려갔다. 밖에선 참새 소리가 요란했다.
명길의 손에 애월의 치마와 속치마가 동시에 올라갔다. 그리고 바지 트임서 홍두깨 같은 양물이 삐져나와 열여덟 애월의 음문으로 들어갔다. 횃대를 잡고 있던 애월이 몸을 비틀었으나 싫은지 좋은지 알길 없었다. 몸이 먼저 홍두깨를 받아들였다. 명길이 힘을 아래서 위로 받쳐 지르자 애월의 몸이 벽을 타듯 들썩 거렸다.
“아…아악”
애월은 입술을 깨물어 터져 나오는 소리를 집어넣으려 했으나 쾌락을 못 이겼다.
그때 후드득 횃대가 끊어지면서 홍단령이 방바닥에 펴지고 말았다.
“대감 마님 죄송…아”
애월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사죄하려 했으나 명길이 또 한번 밀어붙이는 바람에 미쳐 말을 뱉지 못했다. 명길은 그런 그녀를 홍단령 위로 눕히고 허겁지겁 방사를 치렀다. 일각 안에 끝내지 못하면 상참에 늦을 판이었다.
싫은지 좋은지 알길 없는 몸이 먼저 홍두깨를 받아들였다
“아니 승지께선 왜 단령을 그리 구긴 채 입었소? 마나님이 옷 하나 챙겨주지 않는 모양이구려. 북촌 아흔아홉칸 갑부께서 단령이 한 벌 일리 없을 것이고….”
입궐한 명길에게 동부승지 우공량이 능글맞게 시비를 걸었다.
‘저 놈 중뿔난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바지만 내가 승정원(대통령 비서실) 특진관인지도 모르고 아직도 지 수하 취급인가.’
명길이 입만 웃으며 목례를 했다. 그때까지 명길은 단령 한쪽이 방사에 살짝 젖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애월의 근본은 비녀가 아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양인인 박씨의 소작농 딸이었다. 곧 혼인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그의 애비가 공납(조세)을 내지 못해 시달렸고 끝내 유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박씨는 친척집으로 숨어 다니며 끼니를 잇는 유망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박씨와 처지가 같은 다른 전호(소작농)들은 고향을 버리고 화전을 일구거나 무인도로 들어가 초근목피했다. 서북 사람들은 아예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달아나 공납을 피했다.
박씨와 박씨 처, 그리고 애월은 명길의 향리 경상도 창녕에서 도망 다니다 추노꾼에 잡혀 도성까지 오게 됐다. 그 무렵 향리에 내려간 명길에게 추노꾼이 박씨 가족 다섯을 굴비 엮듯 끌고 와 흥정을 했다.
명길은 단박에 애월을 알아보았다. 하여 여종 시세가 시중 삼베 백이십필인 것을 알고서도 이백사십필을 주고 샀다. 기방을 어지간히 드나든 바 있어 물건을 알아보는 눈이 남달랐다.
하지만 명길은 애월의 가족을 모른 채 하고 돌려보냈다. 애월이 열흘간 식음전폐하며 울고불고 했으나 “네년이 육보시를 하면 네 가족을 사들여 외거노비로 삼겠다”고 말했다. 애월은 눈을 질끈 감고 치마끈을 풀었다.
독거노인들에게도 세금징수
박씨네와 같은 농민의 유망이 급증하자 조정대신들은 “전하의 공덕을 모르는 후안무치한 백성들”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은근히 임금에게 그 책임을 돌리며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노회함이었다.
어수룩한 인조는 그것도 모르고 “공납과 신역(군역과 부역)에 탁월한 학문을 지닌 대신들의 얘기”라며 자신의 서책(수첩)에 적으라고 내관에 눈짓을 주었다.
사실 백성이 공납과 신역을 포기하고 증발해 버리면 세정과 국방이 파탄 나 종국에는 양반 자신들도 쪽박 차게 되어 있었다.
유망이 늘자 조정은 족징(族徵)과 인징(隣徵)이라는 기막힌 수를 만들어 냈다. 유망한 백성의 ‘친족에게도 징수한다’ ‘이웃에게도 징수한다’라는 뜻이었다.
이 과도한 공납과 신역에 백성 너나없이 이렇게 한탄했다.
“도망한 백성 중 강한 놈은 도적이 되고 약한 놈은 중이 된다.”
또 문신 조익은 통탄하며 글을 남겼다.
‘군현민 중 가난한 이들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데 부유한 자들은 일년에 수천 석씩 미곡을 쓰는구나.’
그 족징과 인징의 주창자가 최명길의 창녕 최씨 가문이었다.
“한국은 관료와 재벌을 위한 국가인 걸 왜 모르는가?”
한데 광해군이 이 견고한 틀을 흔들었다. 광해군은 공납과 신역을 그대로 두면 신권은 끝 간 데 없이 강해지고 왕권은 허수아비가 될 것 같아 대동법을 전격 시행했다.
대동법은 소작농 등 땅을 가지지 않은 농민에게는 세를 부과하지 않고 땅 주인에게만 세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그 공납은 예전과 달리 특산물도 아니고 오로지 쌀로만 받는 제도였다.
양반과 신료들은 아우성이었다. “짐승과 양반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으라는 것과 같다”며 극력 반발했다.
광해군은 뚝심 있게 대동법을 몰아붙였다. 영의정 이원익이 조선이 살기 위해선 조세 정의가 실천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광해군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몇몇을 위한 신권 국가였다. “서자가 임금이 되더니 사람 아닌 것들만 위한다”는 양반들의 공격에 광해군은 결국 타협점을 찾아 경기도에 한정해 대동법을 실시했다. 비옥한 삼남에 적용되지 않는 법이었으므로 집권당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이원익은 바로 좌당(좌파)으로 몰렸다.
한데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대사헌 김육은 이때 대동법의 전면 실시를 주창했다. 당연히 최명길 등 사대부가 나서 김육을 좌당으로 몰아갔다.
“조선이 양반의 나라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작농을 공납에서 빼주자는 것은 사직을 부정하는 극악무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김육은 여진이나 왜구 등 오랑캐를 따르는 종진(從眞), 종왜(從倭)세력이다.”
대통령, “관료들이 시켜 복지공약 읽었을 뿐이다”
그 신권파(보수세력 격) 실세가 특진관 최명길이었다.
김육의 주장이 거세지자 최명길이 인조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요즘 들으니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법을 시행하려면 반드시 변통이 필요합니다. 농민들이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농민조차도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인조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어려움이 있구먼. 공납으로 받으면 쉬운 것을… 백성 스스로가 반대 할만 하군. 최 승지가 옆에 있어 든든하오. 경연 때마다 좋은 지혜를 주셔서 감사하오.”
최명길은 으쓱하여 임금 앞에 엎드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좋아했다. 마치 개가 던져진 고깃덩어리에 좋아라 꼬리 흔드는 꼴이었다.
그에 지사 이종구도 거들었다.
“삼남 지방 사람들은 전결(논밭에 물리는 세금)이 많아 쌀로 물리는 대동법을 싫어합니다. 그러하오니 강원도에서 우선 실시하고 후에 삼남에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옵니다.”
인조는 내관에게 적으라는 눈짓을 했다. ‘이종구도 학식이 있는 자로다’ 생각했다.
대사헌 김육이 즉각 반박했다.
“전하, 대동법 팔도 실시는 인조반정 때 전하께서 만백성에 고한 공약이옵니다. 이를 뒤집으시면 종묘사직에 어찌 향배하고 잔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최명길과 이종구의 소는 전하와 백성을 기망하는 것이옵니다. 강원도 땅은 조세를 거둘만한 논이 없사옵니다.”
인조는 김육의 얘기에 버럭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니, 내가 언제 그 같은 공약을 하였소. 그날(광해군 15년 3월) 난 서궁에서 곤히 자고 있는데 최명길, 이괄, 김자점 등이 어서 나와 어의를 입으라 했소. 그러더니 뭐라고 쓴 종이 몇 장을 주더니 읽으라 하였소. 댓바람에 불려나와 읽은 것이 나중에 보니 대동법 실시 등과 같은 공약이었소. 그런데도 그것이 어찌 내 책임인 듯 말하오. 대사헌은 결기만 높이지 마시오. 사대부들이 반대한다지 않소. 백성도 쌀로 내면 번거롭다고 상소를 올린다 하지 않소. 강원도에만 실시합시다.”
“맞습니다. 전하. 김육은 왕안석과 같은 이옵니다. 주자학이 이념인 나라에서 신법으로 양민을 위한다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옵니다.”
최명길이 남송(南宋)의 경세가 왕안석까지 거들먹이며 김육, 조익, 이기조 등을 몰아세웠다. 그들은 같은 집권당 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 앞에 즉각 파당을 지었다. 그리고 인조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괄과 김자점이 누구보다 두려웠다. 그들이 광해군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칼날을 겨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동법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방납업자(재벌 격)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방납은 백성이 공납 등을 할 때 ‘규격에 맞는 특산품을 내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률’이라고 윽박질러 그 공납을 자신들이 대납을 해주고 고리를 챙겨 부자가 된 이들이다. 백성이 직접 공납하겠다고 해도 트집을 잡아 물리쳤다. 당연히 권력의 비호를 받았다.
보건복지부장관 사퇴, “골수 보수 말만 듣는 대통령”
상참이 끝난 것은 해가 중천에 떠서였다.
최명길은 쥐뿔도 모르는 김육이라는 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백성이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자들인데 그들 대신해 사대부가 땅을 파고 수확물을 내놓으라니. 군위신강도 모르는 자 아닌가. 저렇게 체제를 부정하는 자가 어찌 벼슬자리를 꿰차고 않았을꼬. 이조(吏曹)에 있는 김육의 신언서판을 들여다보고 임금께서 내치시도록 상소를 올리던지 해야지 원.’
그렇게 가마 위에서 중얼대다보니 북촌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힘깨나 쓰는 대반가가 즐비한 북촌이었다. 개중에서도 명길의 사저 솟을대문이 유난히 높았다.
‘자고로 여자란 참고 지르는 소리가 아름다워야 해. 애월은 그게 있어. 상참만 아니었으면 한 나절은 족히 놀았을 텐데…어서 가서 애월이를 다시 불러 들여야겠구나.’
그렇게 명길이 가회동 길을 오르고 있을 때 김육은 사직서를 써 내려갔다.
‘신은 백성 없이 나라가 있을 수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전하께서 유리걸식하며 팔도를 떠도는 농민들을 저리 놔두면 결국 저들은 검계가 되거나 반역을 꾀할 것입니다. 전라도 함평 사람 김순필은 공납에 쫓겨 유망하다가 “우리를 따라오면 옷과 밥이 풍족하다”는 도적 장수 김총각에게 빠져 살상을 했다 하옵니다. 이런 자들이 부지기로 늘어난다면 이는 신권과 방납업자에 떠밀린 전하의 책임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다. 소신은 더는 최명길과 같은 골수 보수와 같이 할 수 없사오니 저를 파직하여 주옵소서.’
김육이 붓을 내려놓을 때 최명길은 사랑채에서 되레 제가 소리를 질렀다. 쾌락이 뿌리에서 정수리로 터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애월이 그 소리가 안방마님 귀에 들어갈까 하여 자그마한 손으로 그니의 입을 틀어막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