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8강 진출의 과업을 어깨에 진 홍명보(44)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은 마음속에 독기를 품은 듯했다. 홍 감독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단 간담회를 열어 브라질월드컵을 향한 로드맵을 비교적 상세하고 진솔하게 공개했다.
다음은 홍 감독의 주요발언 내용.
“2012년 런던올림픽의 영광은 잊었지만 경험은 잊지 않았다. 당시의 경험을 살려 브라질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좋은 경기를 하겠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옥석을 가려야 한다. 내년 1월 전지훈련 때 K리그 선수들을 부를 것이다. 새 얼굴이 등장할 수도 있다. 3, 4월에 선수들을 지켜보고 5월엔 가장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을 최종 선발하겠다. 내년 5월이 가장 중요하다.
2009년 청소년 대표팀 감독 때부터 한솥밥을 먹어온 구자철(볼프스부르크), 홍정호(아우크스부르크) 등은 자식과도 같은 선수들이다. 내가 대표팀 사령탑을 맡으면 이런 선수들을 내칠 수 있어야 하는 데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대표팀 사령탑 이야기가 나왔을 때 고사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안지 마하치칼라에서 고독하고 힘든 지도자 연수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는 냉정해질 자신이 있다. 자식 같은 선수들도 언제든 내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대표팀 사령탑을 수락했다.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나와 함께했던 선수들은 더 긴장해야 할 것이다. 기량이 떨어지면 곧바로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1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브라질과 평가전을 치른다. 런던올림픽 준결승전 때 맞붙었던 브라질이 생각난다. 당시 브라질은 우리가 저돌적으로 몰아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록 우리가 허무하게 골을 먹어 0대 3으로 지긴 했지만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이번 평가전에서도 우리 선수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경기 외적인 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대표적인 게 기성용(24·선덜랜드)의 ‘SNS 파문’이다. 영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 기성용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네가 일으킨 문제니까 네가 해결하라’고. 기성용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하더라. 일단 브라질과의 평가전과 15일 열리는 말리와의 평가전에서 기성용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먼저 최강희 전 국가 대표팀 감독에게 사과해야 한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돌려보낼 것이다.
박주영(28·아스날)의 경우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새로운 팀을 찾으려 하고 있다.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누구든 팀에서 6개월 이상 경기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면 뽑을 수 없다.
이동국을 어떻게 활용할지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은 줄 알고 있다. 이동국은 현재 A매치 99경기에 출전했다. 한국축구를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기 이상)에 가입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한국축구는 실질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당시의 유산을 다 잊었다. 언론과 프로축구 구단들의 책임이 크다. 구단의 경우 리그 막판 순위 경쟁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국가 대표팀의 A매치 기간을 존중해 주고, 선수 차출에도 적극 협조해 줬으면 좋겠다. 구단과 대표팀이 서로 상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한국축구에 유산을 남겨 주고 싶다.
나는 내 방식으로 선수들을 이끈다. 일각에서는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감독이 좋은 성적을 낸다는 말을 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선수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건 딕 아드보카트 전 대표팀 감독에게 배운 것이다. 당시 난 코치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아드보카트 감독은 어떤 선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그 선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내게 지시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의 ‘선수 경영’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난 내가 지도하는 선수들을 절대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대화를 시도했다. 감독의 일방적인 지시에 익숙해 있던 선수들은 처음엔 당황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추구하는 축구는 창의적인 축구다. 창의적인 축구를 하려며 선수들이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6월 취임한 이후 여섯 차례의 A매치 경기에서 1승3무2패라는 성적을 거뒀다. 물론 성적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 국가 대표팀 감독이 이기지 못하면 창피한 노릇이다. 하지만 눈앞의 성적보다 브라질월드컵 때의 성적이 더 중요하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은 ‘오대영’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기 원칙을 고수해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이라는 신화를 썼다. 나도 현재의 시행착오를 자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팬들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이제 팬들이 원하는 부분도 충족시켜야 한다. 느낌 아니까!”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