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계족산 봉수대(한국전력 대전충남지사 격)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회덕현(지금의 대전시) 관아 소속 칼자(요리사) 미량은 흘러내리는 허리띠를 받쳐 올리며 계족산성을 향해 나아갔다. 봉수대는 산성 남문 쪽에 있었다.
‘이를 어쩐다. 혼자서 서른 명이나 되는 봉수군 밥을 어찌 댄단 말이야. 사월이는 하필 이때 달거리 통증이 날게 뭐람.’
봉수대 칼자는 2인1조가 되어 나흘씩 3교대로 근무했다. 그러나 미량과 짝된 사월이가 사단이 나는 바람에 혼자 해야 될 판이었다.
미량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갈참나무 숲을 지나고 있었다. 사동 개똥이가 저 멀리 앞서 가고 있었다. 쌀섬을 지게에 졌는데도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두어해 전만해도 콧물 흘리던 질청 사동이었는데 올 봄 들어 부쩍 커버렸다. 슬슬 사내가 되어 미량 주위를 끙끙 거렸다.
“누이! 빨리 와요. 거의 다 왔어요.”
“어, 천천히 좀 가자.”
숨을 몰아쉰 미량은 함지박을 내려놓고 저고리 아래 허리띠를 다시 여몄다.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허리띠를 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멋스러웠다. 이팔청춘에 들어선 미량의 가슴은 죌수록 선이 살아났다.
전력공사 대전지사 직원 성폭행, 처벌은 정직 6개월이 고작
회덕현 여인 중 허리띠를 처음 한 이는 미량이었다. 사옹원(궁궐 음식 업무 관할 기구) 장식(掌食) 으로 출세한 후남이가 세자께 올릴 갑천 가물치를 구하러 내려왔다가 미량에게 알려 준 것이 한양 저고리 맵시였다. 저고리를 깡똥하게 입는 것이 요즘 한양의 멋이라고 했다. 여기에 옥양목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법을 꼼꼼히 일러주었다.
“곱다. 정말 곱다.”
자신의 허리띠를 빼서 들러본 미량에게 후남은 연신 감탄했다.
“네가 가져도 돼. 궁궐에선 흔해.”
“정말이야! 고맙다 후남아. 이거 들러 매고 나가면 사내들이 쳐다 보다 발 헛디뎌 도랑에 빠지는 거 아니니?”
“그러고도 남지. 네가 회덕 최고 미인 아니니. 부럽다 얘.”
후남은 늘씬한 미량의 자태에 눈을 흘리며 시샘을 냈다. 미량과 후남은 어릴 적 동무였으나 회덕역말 참봉이었던 후남의 아버지가 한양 사복시(수레나 말을 관장하는 관서) 관리로 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됐다.
미량은 사옹원 장식이 되어 내려 온 후남이를 만난 후 마음이 들떠 도무지 일손을 잡지 못했다. 한양만 가면 멋진 옷을 입고, 잘 생긴 사내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남아. 나도 사옹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네가 힘 좀 써줘. 응. 꼭 부탁이야. 내가 봉수군들 밥이나 해주고 평생 살아야 하겠니? 좀 부탁해 응.”
미량은 아끼고 아끼던 갑사 향낭(향수)을 후남에게 주었다.
공사 직원 한대전, ‘목멱산 다람쥐’로 불려
계족산 봉수대 오장(伍長) 한대전은 목멱산 봉수군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병조 무비사(武備司) 소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회덕현감의 지휘를 받는 지방군 신세가 됐다.
그는 경봉수(京烽燧)로 근무할 때 ‘목멱산 다람쥐’로 불렸다. 5년 전 일이었다.
당시 남산골 딸깍발이가 몰려 사는 필동에선 부녀자 강간 사건이 잊을 만 하면 발생했다. 가난한 선비의 처나 여식들이 양반 신분을 애써 감추고 왕십리 채전으로 날품팔이를 다니곤 했다. 그런 날이면 진고개(충무로)를 넘어야 했는데 이를 노리는 ‘날다람쥐’가 있었던 것이다.
경포(京捕)들은 1년여를 잠복했다. 그리고 그 범인을 잡은 결과, 무비사 소속 봉군 한대전이었다. 포졸들이 이태원 한대전의 집을 급습했을 때, 헛간에 아녀자 하나가 자갈을 문 채 갇혀 있었다. 무명 치마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붙잡힌 한대전이 말했다.
“이 여인은 나와 정분이 났을 뿐이오. 난 결코 강간하지 않았소. 다만 말을 듣지 않아 가두어 놨을 뿐이오.”
한대전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립문 쪽으로 냅다 도망을 쳤다. 포졸들이 “저 놈 잡아라”하며 뒤쫓았으나 봉수군으로 단련된 그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한대전을 덮치기 전 후망 포졸을 세워 둬 재차 잡을 수 있었다.
그를 결박해 다시 여인이 있는 헛간으로 되돌아 왔을 때 여인은 넋이 나가 헛소리를 했다. 여인은 입 결박이 풀리자 한대전에게 달려들어 그의 바지 끈을 풀며 “이년을 어떡할래요, 이년을 어떡해”하며 그의 양물을 잡아챘다. 한대전이 불알 털리는 줄 알고 “아이고 살려주시오. 내가 잘못했소”라며 아우성쳤다. 여인은 강간당한 후 실성한 상태였다.
포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증언이 없는 한 공소 유지할 수가 없는데 여인이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화가 난 포졸들이 “에라, 이 썩어 디질 놈아!”하면서 한대전을 마구 밟아 댔다.
발버둥치는 미량의 다리를 벌리는 강간범
“밥에서 뭔 탄 냄새가 이리 나. 칼자 씩이나 되면서 밥 하나도 제대로 못하나? 에잇, 너나 먹어라!”
오장(伍長) 한대전이 미량에 밥사발을 던졌다.
미량이 쩔쩔 매며 떼구루루 구르는 밥사발을 주워 머리를 조아렸다.
“오장 어른,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다시 짓겠습니다. 날이 눅눅해 솔가지 불 조절을 못한 듯 하옵니다.”
봉수대 보군들은 그런 꼴을 보면서도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 고슬고슬한 밥은 맛있기만 했다. 보군들은 미량에 어깃장을 놓는 오장이 눈꼴 사나왔으나 신량천역(身良賤役·양인과 천인의 중간)에 속한 그들로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오장에게 잘못 보였다간 윤회수직에 철저한 불이익이 주어지거나 다시 천인 신분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미량은 오장의 시비에 축시(밤 1~3시)까지 발이 닳도록 봉수대 부엌을 드나들어야 했다. 오장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 사방이 칠흑 같이 어두워 져서야 일을 마친 미량은 긴장이 풀렸던지 측간이 급했다. 그녀는 봉수대 아래로 내려갔다. 더듬더듬,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간신히 움막 형태로 된 측간 싸리문은 여는 순간, 큼지막한 손이 입을 막았다.
상대의 눈 인광이 번뜩이는 듯 했다. 정신이 혼미해진 미량은 발에 힘을 주어 발버둥을 쳐봤으나 곧바로 몸이 들려 허공에서 허둥대는 모양새가 됐다.
미량은 움막 옆으로 끌려가 솔가지 위에 내던져 졌다. 본능적으로 앞가슴과 치마를 쥔 밀양이 그
제서야 정신이 돌아와 소리를 지르려 하자 “한 마디만 하면 너는 그 순간 죽는 줄 알아라”하는 낮고 음산한 목소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 꼼짝 할 수 없었다.
어둠에 조금 익숙해지자 사내가 웃옷을 벋고 바지마저 내렸다. 오장 한대전인 듯 했다.
미량은 측간에 오기 전 혹시 몰라 칼을 쥐고 올까 하다가 놓고 온 것을 후회했다. 손을 뻗어 잡히는 데로 쥐어 봤으나 잔솔가지뿐이었다.
사내는 들짐승처럼 다가와 가쁜 숨을 밀양의 얼굴에 내몰더니 미량의 허리띠를 후드득 뜯어냈다. 미량이 눈을 질끈 감고 신령님을 찾았으나 하늘은 먹구름을 거두어 달빛만 보내줬을 뿐이다.
사내는 발버둥치는 미량의 양 발을 벌려 힘으로 짓눌렀다. 솔바람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밤이었다.
전력공사 밀양지점, 전력선 건설에 따른 향응 받아
순조 10년. 함경감사 조윤대가 봉수를 혁파할 것 주장하는 계를 올렸다.
‘팔도 650여개 봉수는 그 봉군들의 도덕적 해이로 곳곳에서 사고를 내고 있사옵니다. 이를 관리하는 무비사와 각 수령은 봉군들이 외진데 있다하여 둘러보지 않아 그들이 보고하는 데로 믿고 봉록을 지급함으로써 조세를 축내고 있습니다. 또 신역과 군역을 회피함은 물론 부녀자 강간 등의 악행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근자에 들어서도 계족산 봉수대 한대전이라 자가 칼자를 강간하였고, 제물포 축곶산 봉수대에선 조인천이란 자는 봉군 딸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사옵니다. 충주목의 봉군 하나는 여염집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적발 되었사옵니다. 밀양 추화산성 봉수대 오장은 축성 업자에 이끌려 기생집에서 향응을 받았으며 전주목 소속 오장은 봉수대에 쓰일 소똥과 말똥을 빼돌렸다고 합니다.’
이때 봉수대를 관장하는 병조판서 한익환은 상참(국무회의 격)에서 순조 임금에게 억울하다며 호소했다.
“봉군들은 오지에서 적변을 알리고자 오늘도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사옵니다. 함경감사가 계를 올린 내용 중 그 진위가 맞는 것은 없사옵니다. 도리어 봉군들의 별도(別途·수당 격)를 대폭 인상하여 그들의 사기를 높여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옵니다.”
순조가 말하였다.
“경상도 밀양에서는 봉화의 화력을 높이기 위해 양민을 동원하고, 일대 땅을 수용하여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다 한다. 또 오장이 축성에 따른 군역과 신역을 빼주고 향응을 받았다 하니 이는 어찌 된 것이냐?”
“전하, 이는 봉화대 인근 마을에 사는 왜인 후손인 듯한 무리들이 국방의 체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술책이옵니다. 이들은 임란 당시 왜병들로부터 강간당한 아녀자들이 낳은 후손들인데 적국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승정원 도승지가 거들었다.
“무식한 백성들의 방해로 황령산봉수대(부산진구)에서 올라오는 봉수가 밀양서 끊겨 병조가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에 보고도 못하고 있사옵니다. 매일 아침 올라오던 보고이옵니다. 진무사라도 파견하여 무지한 왜구 씨들을 멸절시켜야 하옵니다. 그들 대개는 화전이나 붙여 먹고 사는 무지랭이들이옵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병조판서 한익환은 쾌재를 불렀다.
서자 한대전의 강간 사건이 유야무야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익환은 음서직으로 나간 아들이 목멱산에서 쫓겨나 전라도 고흥 봉수대로 갈 듯 하자 승정원 도승지에게 부탁하여 계족산 봉수대에 눌러 앉혔던 것이다.
전력공사 임직원, 도덕적 해이 심각
순조 말년. 국가의 봉수 체계는 중앙의 눈이 멀어 봉록을 축내는 봉군들로 넘쳐났다. 산에 한 번도 올라가지 않고 집 안에서 놀며 녹봉을 타는 자가 무릇 몇 천이었다. 그럼에도 650여 봉수대는 자기들만 아는 신호로 감찰을 피해갔다.
한편 한대전은 측간 강간 사건’을 일으키고도 옥에 갇히는 것은 고사하고 정직 6개월로 상황이 끝나자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칼자 미량의 앙칼진 저항이 되레 그를 자극해 또 한번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 일로 회덕현 민심이 들끓었으나 조정은 회덕현감 자리를 팔아 궁궐을 유지하는데 보탰으므로 민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있은 후 미량은 밤마다 칼을 갈았다. 스윽스윽 칼 가는 소리가 달 밤 이리 우는 소리 같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