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일본에 의사(義士)가 있소”…니시자카 유타카, 그는 누구인가

“어찌하여 일본에 의사(義士)가 있소”…니시자카 유타카, 그는 누구인가

기사승인 2013-10-27 12:00:01

[쿠키 문화] ‘사람이란 것이 춘추(春秋)만 정대(正大)하면 피아국(彼我國)이 상관없소. 한국에는 어찌하여 매국대신이 있고 일본에는 니시자카 유타카씨 같은 의사(義士)가 있소.’

1906년 12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일본인 니시자카 유타카(西坂豊)를 ‘의사’라고 부르며 을사조약에 찬성한 대신 5명(이완용, 이제용,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을 통렬히 비난했다.

‘일본인 의사’ 니시자카,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4주년(10월 26일)을 3일 앞둔 지난 23일 한 포털사이트 영화 코너에 ‘리부트(Reboot)’라는 제목의 예고편이 올라왔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의 시간적 배경을 2014년으로 옮겨 담은 이 영화에 니시자카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니시자카는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국 침략 반대’를 주장하고, 일축 당하자 그 자리에서 할복자살한다.

25일 니시자카를 연기한 배우 김주황(42)씨를 만났다. 그는 “동양의 평화, 한국 침략 반대라는 소신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영화를 찍기 전에는 ‘안중근과 유관순은 훌륭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나쁘다’ 정도 밖에 몰랐다”면서 “짧았지만 니시자카 유타카란 인물이 돼 본 것이 한일 역사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폭 넓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영화를 제작한 카우파영화연구소 허존 대표는 “미궁에 빠져 있는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에 대해 예전부터 관심이 많아 7개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발굴 과정을 그린 영화를 기획했다”며 “자료 수집 과정에서 니시자카 유타카란 인물에 대해 우연히 알게 돼 예고편에 넣었다. 언제 제작이 완료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말했다.

니시자카와 관련된 국내 연구는 2011년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일본에서 발표한 소논문 ‘한일양국 평화주의자들의 모델-안중근과 니시자카 유타카’가 유일하다.

대한매일신보 등 당시의 몇몇 언론 기사를 토대로 한 이 논문에 따르면 니시자카는 1879년생으로 안중근 의사와 동갑이다. 아이치현(愛知縣)에서 태어나 와세다(早稻田) 대학과 세이조꾸(正則) 영어학교를 졸업했다는 것 외엔 그의 사상, 사회적 계통, 일본 내 평화세력과의 관계 등 알려진 이력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대한매일신보 1906년 12월 21일, 22일, 24일, 28일자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동양의 평화를 주창하던 그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서울에 통신사 설치 허가를 요청했으나 통감부의 방해로 좌절됐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에게 침략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의 항의 서신을 보냈으나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고, 대한침략 정책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전하기 위해 1906년(27세) 12월 6일 지금의 서울 종로구 운니동인 이현(泥峴)의 부지화(不知火·일본명 시라누이) 여관에서 할복자살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1909년 10월 26일)가 일어나기 약 3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후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니시자카는 묻혀진 인물에 머물렀다.

다음은 신 연구원과 일문일답.

- 니시자카 유타카의 존재를 언제 처음 알게 됐으며, 어떻게 알게 됐나.

“약 10년 전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오수불망’이라는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든 역사책에 관련 내용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 그 전까진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나.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황성신문, 대한자강회월보, 공립신보, 매창야록, 오수불망, 저상일월 등 자살한 무렵에 몇몇 신문과 자료에 거론된 것 외엔 국내는 물론 일본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 일본에서 니시자카 유타카에 대한 소논문을 발표했을 때 반응이 좀 있었나.

“한 일본인 활동가가 자기 단체의 홈페이지에 번역 게재한 것 외에는 없다. 국내에서도 인터넷에 번역돼 있는 것이 있다.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반응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 당시 기사나 비록에 언급된 내용 외에는 생가나 무덤 위치 등의 자료도 없는 건가.

“현재까지는 (대한매일신보 등 앞서 말한) 국내 자료에서만 확인된다. 일본에도 있으리라 생각이 되지만 일본에서 조사하기에는 시간과 경제적 문제가 따른다.”

- 요코야마 야쓰타케(조선 정벌 반대 건의문과 신정부 개혁안을 메이지 정부에 제출한 후 할복자살한 무사,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초대 문부상 모리 아리노리의 친형이기도 함)와 같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 반대한 몇몇 일본인들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니시자카 유타카에 대한 연구나 구체적 규명 활동이 부진한 이유는 뭔가.

“그는 (자살 당시) 27세인 무명인이었다. 니시자카 유타카에 대한 사료의 부족과 함께 그의 존재 의미 부여가 미진하기 때문 아닐까.”

- 다른 인물들과 달리 니시자카 유타카가 안중근 의사와 관련돼 갖는 특별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

“대한매일신보는 안중근 의사보다 먼저 니시자카 유타카에게 의사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현재 아베 총리와 같이 과거 일제의 한국과 아시아 침략 미화라는 일본극우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일본 내의 평화세력의 신장이 절실하다. 이러한 때 니시자카 유타카와 같은 분을 기린다면 일본의 평화세력에게 자극이 될 것이고 평화를 중심으로 한일양국의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 학자로서 니시자카 유타카란 인물에 대해 추적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관련해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당면한 과제는 니시자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다. 올해 또는 내년에 한일평화세력이 힘을 합쳐 니시자카 유타카가 할복한 장소의 근처인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입구에 동상과 기념비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지원을 서울시에 요청한 상태인데 아직 이렇다할 답변은 없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트위터 @noo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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