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국가보훈처장, 대통령 '뚝심' 믿고 국민 앞에 완장찬 조폭처럼 굴어

[전정희의 시사소설] 국가보훈처장, 대통령 '뚝심' 믿고 국민 앞에 완장찬 조폭처럼 굴어

기사승인 2013-10-30 12:53:00

[전정희의 시사소설 - ‘조선500년 익스트림’]

“어찌 이리 뜸하십니까. 이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당장 죽는다 한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렇게 대감을 품고 한 백년 살수만 있다면 죽음이 두려우이까.”

지밀상궁 귀열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환한데도 사방이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수많은 별이 불꽃놀이 하듯 터졌다. 아랫배에선 뜨겁고, 미끈한 것이 드나들며 몸을 데웠다. 귀열은 자신의 고개가 저절로 꺾임을 느꼈다. 어여머리(예장용 머리형의 하나)가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쾌락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에 어둠과 별들을 만들어냈다.

귀열은 앉은 자세로 사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궁복도 벗지 아니한 채였다. 그곳은 지존이 거하는 창덕궁 중희당이었다.

“대감을 알고 궁녀가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아…으. 처음으로…제 몸이 제가 주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허억”

귀열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내는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귀열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귀열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쥐고, 짧으나 힘 있게 앞으로 당겼다. 귀열은 서른 후반이었다. 사내를 알지 못한 탓인지 이팔청춘의 여인처럼 아름다웠다. 사내의 물건이 좁은 다식판 구멍을 들 듯했다. 그 다식판 구멍은 넘치는 샘물로 적당한 암수를 이루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맞춤한 음양은 열락을 더했고 열린 숨구멍마다에선 운우지정의 꿀물을 생산해 냈다.

사내는 경기관찰사 동척사였다. 병조판서(국방부장관 격) 민겸호와 함께 선혜청 당상(보건복지부장관)을 겸하고 있었다.

《쾌락은 어둠과 별들을 만들어냈다》

동척사는 헌종 14년 별시를 통해 벼슬길에 나가 예방승지, 개성유수 등을 지냈으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부패 관리로 지목돼 축출됐다. 예방승지 때 궁녀들에게 손을 써 조정의 내밀한 소식을 먼저 접하고 이를 활용하며 승승장구했었다.

출세욕이 강했던 그는 직위를 활용, 왕의 침전에서 일하는 궁녀들에게 향갑과 향낭 등을 선물하며 환심을 사는 재주가 있었다. 특히 궁녀 최고 직위라 할 수 있는 지밀상궁에게는 패물 등을 쥐어주며 왕의 귀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데 고종 1년 개혁가 대원군이 대숙청을 단행하며 동척사를 내쳤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민비의 척족이 권력 전면에 등장했고 조정은 민씨 성 가진 이들로 채워졌다. 승정원 도승지를 비롯해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은 모조리 민씨일파(PK 격)가 맡았다.


그 척족정권에 희귀성인 동씨가 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지밀상궁 귀열과 민겸호의 절대 신임이 컸다.

사실 동척사로선 성균관 동문 민겸호를 후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뇌물을 주면 될 일이었다. 안동김씨 이래 씨족정치로 이어져온 조선은 이미 율령이 무너져 삼정문란과 매관매직으로 지새 나라의 꼴이라고 할 수 없었다. 궁궐 담에 자란 풀조차 뽑을 수 있는 영이 서질 않는 조선이었다.

그 무렵 동척사는 민겸호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어영청, 무위소 같은 구식 군대가 그게 군대인가. 당나라 군대만도 못하지 않나. 군졸이라는 것도 녹만 축내는 비렁뱅이들 아닌가. 양민조차 군역을 회피해 다 무식쟁이 노비로만 이뤄져 있지 않는가 말이네. 그런데 그들에게 녹봉미를 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를 선혜청 당상 겸하게 해주게. 그러면 녹봉미 자네에게 모아 줄 것임세.”

이에 어수룩한 민겸호가 답했다.

“그 엄청난 녹봉미 줄인다면야 못할게 뭔가. 한데 임금께서 외척 견제하느라 내 말을 안 들으시네.”

민겸호의 말에 동척사는 귓말로 수군댔다. 지밀상궁 귀열을 이용하자는 제안이었다.

동척사는 귀열이 나인으로 있을 때 그녀를 노리개 선물로 녹여 놨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귀열의 내명부 품계가 오를 기미를 보이자 달보고 눈물 짓은 귀열의 춘정을 건드려 간통했던 것이다.

궁녀는 무수리로 궐에 들어 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임금과 혼인식 올리게 된다. 이 혼인식엔 물론 임금이 신랑으로 나서지 않는다. 혼자 올리는 혼인식 셈이다. 하지만 그 혼자 하는 혼인식조차 평생 궁궐을 빠져 나올 수 없는 궁녀들에겐 생의 최대의 기쁨이었다. 따라서 이후 궁녀와 사통을 하면 간통이 되는 것이다.

궁녀와의 간통은 당연히 참수형 받았다. 그러나 조선말에 이르면서 궁녀의 사통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궐내 여기저기서 황음이 이뤄졌다. 사산된 시신이 아궁이에서 불타고, 정원에 묻은 핏덩이가 북악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에 파 먹혔다.

《친일 군인의 탄생》

귀열은 분명 고종의 성은을 입었다. 임금의 침전 자리를 책임지는 지밀상궁은 어찌 보면 왕비보다 더 속 깊은 자리였다. 필부필부 이룬 여염집 아낙네와 같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임금의 손이 닿을 기회가 많았다.

딱 한 차례 성은을 입은 귀열은 이후 대신들의 성화에 결국 후궁이 되지 못했다. 귀열의 오뚝한 콧날은 종묘사직에 화가 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에 고종은 늘 미안해했다. 그래서 지밀상궁 자리를 오래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사내를 알아버린 귀열은 봄아지랑이처럼 신비한 육신에 늘 허기를 느꼈다. 그때마다 육정에 못 이겨 동척사를 창덕궁 중희당으로 불러내곤 했다. 지밀상궁은 궐의 재정과 인사권을 모두 가진 자리여서 누구도 중희당에 얼씬 못했다.

동척사는 귀열의 내연이 되어 승승장구했다.

그날도 두 사람은 옷도 벗지 아니한 채 앉은 자세로 접문을 하면서 서로를 탐했다. 왕비 못잖은 어여머리를 한 귀열의 사치로 정배위를 할 수 없었다.

“색다르오. 가체를 하니 그 콧날이 양귀비 저리가라요. 나는 당신의 코에 반해 구애했소.”

동척사가 이번엔 금박 무늬 새겨진 원삼 저고리 사이로 손을 넣어 귀열의 탱탱한 가슴을 쥐고 이같이 홀렸다.

귀열은 연신 희락에 겨워 괴성을 질렀고, 동척사는 그런 귀열의 반쯤 감은 눈과 어여머리를 보면서 땅이 흔들리고 북악산이 무너지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두두두둑 두두두둑 우우 우우’

두 사람의 몸과 머리는 같이 이런 소리를 들었다. 벽력이 치고 폭포수가 쏟아졌다. 그래도 두 사람의 몸은 떨어질 줄 몰랐다.

창덕궁은 임금의 집이었고, 중희당은 세자의 서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조선 군인, 일본의 쌀도둑질을 돕다》

“허 이런 잡년놈을 보았나. 흘레붙은 개꼴이군. 교미하는 사마귀가 저 죽는 줄 모른다더니.”

구식군대 반란군 우두머리 허욱이 중희당을 덮치자 뜻하지 않은 거물이 그물에 걸려 있었다. 중희당으로 들어오기 전 황급히 달아나던 민겸호를 도륙 낸 뒤였다. 반란 전 구식군대는 동척사의 간교로 늦어지던 녹봉미를 겨우 13개월 만에 받았는데 그 절반이 쌀겨와 모래인 것에 분개했다.

그리고 곧바로 무기를 들고 선혜청 창고지기를 패 죽인 다음 민겸호의 사저로 향했다. 경기감영에 있는 동척사는 궐과 멀어 당장 척살할 시간이 없었다. 이른바 임오군란(1882년)의 시작이었다.

민겸호 사저에 들어 일가족을 몰살한 반란군은 민겸호가 창덕궁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천명이 무리지어 황건적처럼 도성을 휩쓸며 몰려갔다.

‘두두두둑 두두두둑 우우 우우’

동척사가 귀열과 열락에 빠져 듣던 말발굽과 함성소리였다.

허욱은 검을 쥐었다.

“여봐라, 년놈 극락 보낼 일 있느냐?”

그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군졸 하나가 벙거지를 벗어 냅다 두 사람의 머리를 치고, 발로 걷어찼다.

“아악!” “어구구”

두 사람의 극락은 그렇게 지옥으로 변했다.

“동척사, 내 죄를 알렸다. 조미(朝美)통상조약으로 나라를 거덜 낸 것도 모자라 일본 공사 하나부사에게 붙어 쌀도둑질 해가도록 돕더니 기껏 한다는 짓이 녹봉미 빼돌리는 것이었더냐? 네 그러고도 색정질 하고 자빠졌더냐? 너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는 백성의 아우성이 들리지도 않더냐? 년놈의 시신을 포를 떠 광화문 앞에 널도록 해라!”

동시에 두 사람을 둘러쌌던 반란군의 칼날이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청룡언월도를 쥔 군사 하나가 도륙 난 두 사람의 목에 번뜩이는 언월도를 내리 꽂았다. 땡그르르 목이 떨어졌다.

《국가보훈처장 동영상, 친일 아버지 애국열사 만들기》

1900년 광무 4년. 고종은 도성 안 남소영(南小營·현 서울 장충단공원) 자리에 장례원 당상(국가보훈처장) 동영상에게 명해 을미사변 때 순국한 장병을 위한 제단을 쌓도록 지시했다. 순국자의 뜻을 기려 춘추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다. 당상 동영상은 동척사의 아들로 음서직 벼슬을 받은 무관이었다.

이에따라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종 임최수, 참령 이도철 등이 순국 충렬로 제수됐다. 또 갑신정변의 희생자 찬성 민태호, 판서 조영하 민영직, 참판 윤태준 이조연, 중관 유재현 등도 장충단에 모셔졌다.

그러나 백성은 민태호 조영하 같은 부패관리가 어떻게 우국충정을 지닌 이들로 제수될 수 있냐며 분개했다. 독립신문은 연일 매국 행위를 한 그들이 결코 장충단에 봉안되어서 안된다고 대곡(大哭)했다.


한데 당상 동영상은 백성이 독립신문과 같은 좌당(좌파)의 언로에 휩쓸려 망국된 행동을 하고 있다며 ‘사대당 애국열사 전기’를 인쇄해 배포하며 결기를 세웠다. 그러면서 임오군란 당시 궁궐에서 황음하다 칼 맞아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칭송하는 거짓 전기도 끼워 넣었다.

“제 부친은 경기관찰사와 선혜청 당상을 지내시면서 가뭄에 유리걸식하는 백성을 위해 사저 쌀창고를 열어 구제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구식 군대가 백성을 위해 나누어 주려던 구휼미를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부친께서는 그 반란군을 막기 위해 청룡언월도를 들고 중희당 앞에서 싸우시다 전사하셨습니다. 따라서 제 부친 동자, 척자, 사자께서도 마땅히 장충단에 제수되어야 합니다. 제가 장예원 당상이라 하여 제수되지 않는 것은 역차별입니다.”

그러면서 동영상은 슬그머니 임오군란 희생자라며 아버지 동척사 및 영의정 이최응, 판서 민겸호, 참판 민창식의 공적 조서를 고종에게 올렸다.

고종이 말했다.

“당상의 부친이야 말로 나라의 귀감이오. 그렇게 언월도를 들고 대역죄인과 맞섰던 분을 내 일찍이 챙기지 못했다니…과인의 불찰이구려. 그분의 항일 뜻을 기려 충정공으로 제수하는 바이오.”

《애국선열, 만들어진 신화의 치욕》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됐다.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대신 조중응 등은 순종 황제 앞에 체결문을 내밀고 강제 조인케 했다. 이날 조약의 기초 문구는 동영상이 마련했다. 그로서 500여년의 조선은 형해화됐다.

그리고 이해 말.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이 장충단을 폐사시키려고 나섰다. 이때 동영상이 나서 장충단 자리에 건립되는 이토히로부미 추존 절인 박문사 건립 공사를 자신이 맡도록 해달라고 간언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부사 공사로 하여금 조선과 일미통상조약 및 제물포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한 인물이라며 작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조선 군대가 주둔하던 남소영 자리는 그렇게 치욕의 역사 현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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