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비변사 필리핀 태풍 표류인 신원 파악조차 못해(2·끝) - 대통령, 국가보안법 강력 적용 지시에 정국 얼어붙다]
그날 인정전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정순왕후가 순조에게 눈치를 주자 살짝 하품을 하던 순조는 정좌했다.
왕후가 말했다.
“종묘 사직을 지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학 무리들이 조정 대신 가운데도 파고들어 국법을 어지럽히니 임금과 제가 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이에 척사를 위한 대명률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들께서도 동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대신들은 수군댔다. 대신들 가운데 사학 무리가 있다는 얘기는 정변 예고나 다름없었다. 왕후의 손가락을 받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린 순조가 말을 더듬더듬이었다. 정순왕후가 미리 가르쳐 준 대로였다.
“비변사(국가정보원 격) 남일배 당상께서 역모에 대해 고하시오.”
그러자 남일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더니 계를 들고 발언하였다.
“근자 제주로 밀입국한 오랑캐 다섯을 잡아 문초한 바 폐하와 왕후 시해를 목적으로 법국(프랑스)에서 보낸 자객이라는 자백을 받았습니다. 비변사는 이들을 상국(청나라) 예부로 압송하여 취조한 바 황사영 정약종 등 사학 괴뢰들이 법국 왕 도움으로 역모를 꾀한 것이었나이다. 그리고 예부에서는 ‘무부무군 멸륜패상’이라며 조선의 사학쟁이들을 섬멸하라는 명과 함께 오랑캐들을 돌려보냈습니다. 따라서 곳곳에 침투한 사학쟁이들을 하루빨리 처단하지 아니하면 종묘사직이 바람 앞에 촛불이 되오니 이참에 대명률을 강화하여 오랑캐와 내통하는 자들을 싸리비로 쓸어내야 할 것이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비래누에버 등 표류인 네 명이 산발한 채 어전으로 끌려 나왔다. 한 명은 청나라 심양 예부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탈진해 죽었다.
“아유다! 아유다!(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들은 울며불며 그렇게 말했으나 소용없었다.
그와 동시에 비변사 군사들이 당당하게 어전으로 난입했다. 순조가 깜짝 놀라 용좌 위로 발을 올렸다. 순조의 얼굴이 하얘졌다.
<<장관들, 남일배 무서워 한마디도 못해>>
비변사 낭청 하나가 대사성 이가환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칼을 들어 칼 등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피가 튀었다. 동시에 이가환의 무릎이 꺾였다. 그러자 군사들이 달려들어 그를 포박했다. 조선의 천재로 불리던 수학자 이가환은 그렇게 능욕을 당했다.
표류인들은 이가환과 몇몇 대신들이 그 자리에서 매를 맞고 포박 당하는 것을 보고 울며불며 아우성을 쳤다.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남일배는 그 자리에서 여섯 명의 대신들을 끌어냈다. 사학쟁이라는 죄목이었다.
그렇게 피의 경연장이 수습된 후 남일배는 순조에게 ‘오가작통법’(국가보안법 격)을 수결해 줄 것을 청했다. 사학을 때려잡는다는 이유였으나 그 속내는 정적 시파 및 남인(구 집권당 및 좌파) 척결이 목표였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 중에 시파나 남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가작통법은 무소불위의 법이었다.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그들 안에서 강도, 절도, 사학 등의 범법 행위가 한 집에서라도 일어나면 다섯 가구 모두 처벌 받은 악법이었다.
대신들은 정순왕후와 남일배의 눈이 무서워 “수결하옴이 마땅하옵니다”라며 오가작통법의 처리를 요구했다.
친국을 마친 여송국 표류인들은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남산 비변사로 이송되고 있었다. 그들은 몇 달 간 이국의 추위와 원행 등으로 살가죽만 남아 있었다. 이후 여송국 표류인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흑산도 출신으로 여송국까지 표류다가 살아 돌아온 문순득이란 자가 흑산도에 유배온 정약전에게 여송국 표류인에 대한 얘기를 전해 간략하나마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구정권 놈들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 없다”>>
이튿날부터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시파 놈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오가작통법으로 묶어 날려 버려. 논공행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밀어내란 말이야!”
남일배는 기세등등해 작두를 탔다.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홍낙임 황사영 등이 처형됐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됐다. 이른바 신유박해였다. 서로가 죽지 않으려고 먼저 사학쟁이라고 밀고를 했고 그럴수록 죽음의 범위는 넓어졌다. 죽은 자가 수만에 달했다.
이로써 정순왕후의 벽파는 정조 이후 권력을 완전 장악할 수 있었다. 왕후의 육촌 오빠 김관주를 승정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힌 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시국사범 소탕이었다. 비변사 당상 김일배가 도승지의 수족이 되었다.
또 영의정(국무총리) 심환지는 정순왕후의 명을 받아 어린 왕을 보좌하는 원로대신이 되어 원상(院相)으로 군림했다. 말이 영의정이지 심환지와 남일배의 수하나 다름없었다.
<<대통령, 국가보안법 강력 적용 지시>>
한편 신유사옥으로 정국을 장악한 정순왕후는 심환지 김관주 남일배를 창덕궁 주합루로 불렀다. 주합루는 규장각의 일부로 정조의 치적 중 하나였다.
“경들을 위해 제가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마음껏 마시고 즐기십시오. 오가작통법이 통과되다니요. 이제 누가 우리를 넘보겠습니까? 우리가 남입니까? 어정쩡하게 있던 사대부들도 모두 돌아설 것입니다. 조선에 좌당이 어찌 있을 수 있습니까? 비로소 조선중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망극하옵니다. 대왕대비마마. 마마께서는 조선의 국모이시옵니다.”
세 사람이 합창하듯 예를 갖추자 악공들이 풍악을 울렸다. 그들을 호위해온 승정원과 비변사 도제들이 규장각 여기저기에 자리해 술판을 벌였다. 정순왕후가 단단히 준비했던지 소주방(궁중음식 만드는 건물)을 통해서 아리따운 기녀들이 연이어 입장하고 있었다.
술과 음식이 규장각 수만 권의 책을 밀어냈으며 기녀들은 책을 뜯어 궐련을 만들어 피웠다. 조선은 그렇게 정순왕후를 시작으로 안동김씨, 여흥민씨 등의 세도정치로 넘어가면서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합루 술판에서 기생 끼고 호기롭게 즐기던 심환지 김관주 남일배는 곧 있을 자신들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안동김씨 국구 김조순이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kmib.co.kr
- 추천해요0
- 좋아요0
- 슬퍼요0
- 화나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