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27일 오전 8시 서울 염창동 삼성전자 양천서비스센터 앞. 온도계는 0도를 가리켰지만 체감기온은 영하로 떨어졌다. 14년간 전자제품을 수리해온 AS(애프터서비스)기사 김문석(39)씨가 피켓을 들고 센터 앞에 섰다. 귀를 때리는 바람과 눈·비가 합쳐진 진눈깨비가 간간히 김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김씨는 30여분간 “AS기사 들의 열악한 사정을 알아 달라”며 지나던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이날 이른 출근길 거리로 나온 건 김씨만이 아니었다. 전국 176개 삼성전자서비스센터 앞에서는 300여명의 AS기사들이 동시에 1인 시위를 벌였다. 제품 고장으로 AS를 신청하면 짧은 시간 안에 대기업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던 이들이 길거리로 나온 건 어떤 이유일까.
통상 내근 직원과 외근 직원으로 나뉘는 삼성전자 AS기사들은 약 6000명이다. 이 중 4000여명이 외근 기사다. 직접 고객 가정을 방문해 냉장고나 세탁기 등을 고치는 사람이 바로 이들이다.
외근 기사의 월급은 수리 건당 수수료로 책정된다. 서비스 요청 한 건을 처리하는 데 보통 한 시간을 쓴다. 품질보증 기간 중인 제품을 무상 수리하거나 악성 고장으로 4~5시간 동안 한 제품을 고치는 데 허비하면 한 건에 3만원이 안 되는 수수료를 받을 때도 있다. 통상 한달에 40~50건 수리해 130만원 정도를 벌고 이마저도 들쭉날쭉하다. 수리 재료비, 장비비, 미수금, 유류비, 차량수리비, 휴대전화비, 식비 등은 자비로 부담한다. 김씨는 “성수기(6~8월)를 제외하면 고객이 없어 120여만원밖에 못 번다”며 “기타 부대비용을 제외하면 50~60만원밖에 손에 쥘 수 없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아 업무시간도 센터별로 제각각이다. 토요일에 나와 일해도 특별수당은 없다. 고객의 수리 요청이 많다보니 밥도 굶기 일쑤다. 또다른 AS기사 김모(43)씨는 “고객의 콜(수리 요청 전화) 사이사이에 햄버거나 김밥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에는 충남 천안에서 AS 기사로 일하던 최종범(32)씨가 자신의 차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동료들에게 “그동안 너무 배고파 못살았다.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다”고 남겼다. 협력업체 측은 최씨가 월평균 410만원의 급여를 받았고 지난해에는 그에게 1000만원을 가불해 줬다고 해명했다. 김씨는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는 AS기사들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의 근무 환경이 이렇게 열악한 것은 하청구조 때문이다. 이들은 삼성전자나 삼성전자서비스 소속이 아닌 협력업체 소속이다. 삼성전자서비스가 AS 업무를 계약한 하청업체는 108개나 된다. 결국 서비스센터직원들은 지난 7월 노조를 만들고 삼성전자서비스 측에 근로 처우를 개선해달라는 교섭을 요청하고 있지만 이 역시 진전이 없는 상태다. 현행법상 교섭 대상이 협력업체가 돼야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16일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서비스가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경제 민주화 바람이 전 사회적으로 불고 있지만 힘없는 하청업체 직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셈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