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총리 "일본헌병대 용산 주둔은 침략이 아니라 진출""

"[전정희의 시사소설] 총리 "일본헌병대 용산 주둔은 침략이 아니라 진출""

기사승인 2013-12-01 14:21:00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총리, “일본은 쪽발이가 아니다. 해동제국이다”(3)

영의정(내부대신·국무총리 격) 정하동과 조선 일본공사 미우라의 정치적 밀약에 따라 동학군 토벌에 투입됐던 조·일연합군이 충청도 제천으로 기수를 돌렸다.

그 사이 일본은 동학농민전쟁을 통해 발언권이 세지면서 조선 정부에 일본 헌병대 창설, 근대식 경찰 업무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미우라의 제의와 정하동의 묵인으로 이뤄진 이른바 헌병경찰제였다.

미우라가 정하동에게 말했다.

“조선의 포도 순검과 포적 순검 등을 다 합해봐야 40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학도당과 같은 반정부 무장활동을 제압하기엔 순검이 턱 없이 모자라지요. 전라도 고부 관아와 전주성이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제국의 군대가 경무장을 하고 돕는다면 누구도 대군주폐하(고종)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천황폐하가 그런 배려를 해준다면야 감읍할 일입니다. 갑오년(1884) 일·청전쟁에서 청나라 군대를 전멸시킨 막강 화력의 제국군대 헌병이니 의병쯤이야 바람 앞에 등불 신세지요. 유인석 도당에게 반란을 일으키면 섶 지고 불로 뛰어드는 꼴이라는 걸 보여주시지요. 일본헌병대의 조선 진출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정하동은 어전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을 ‘진출’이라며 헌병대 주둔의 당위성을 핏대 높여 강조했다. 친일 대신 모두 훤한 얼굴이 되어 고종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의병이 일어났다 하여도 우리 순검이 4000명이나 되는데 2000명의 일본군을 주둔 시킨단 말이오? 우리도 일본 헌병과 같은 성격의 군기대가 있는 마당에 말이오. 적이 염려되는 바이오.”

고종 이렇게 말하자 정하동이 쓴맛을 다시며 나섰다.

“황제 폐하께서도 병자년(1876) 강화도조약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셨습니다. 따라서 양국 간 약속에 기초한 헌병대 주둔은 마땅히 다뤄야 할 우리의 책무이옵니다.”

“내가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고?”

고종은 반문하였으나 그 목소리에는 군주로서 영이 서있질 않았다. 친일파 내각이 장악한 마당에 자신이 싫은 소리를 해봐야 처신만 힘들어질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낌새를 알아챈 고종은 한 달 후 러시아에 기대는 아관파천을 감행하게 된다.

병신년(1896) 1월 일본헌병대가 용산에서 막사를 짓고 출병식을 가졌다. 정하동을 비롯한 내무아문 협판, 국장, 참서관 등이 나서 이들의 주둔을 위한 행정지원을 했다. 민가 백성이 그 한 겨울에 주둔군을 위해 쫓겨나야 했다.

고종의 아관파천 열흘 전. 헌병대 본진은 정하동에게 출병을 통보한 후 기마대를 앞세워 제천 의병 토벌에 나섰다. 헌병대는 이태원을 넘어 왕십리 방향으로 출군 방향을 잡을 수 있었는데도 일부러 숭례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신식 군화에 각반을 차고, 군장을 한 그들은 대오를 갖춰 광화문 사거리에서 종로로 방향을 틀었다. 놀란 백성이 피맛골로 숨거나, 아니면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이들이 지나는 길은 동원된 순검들이 열었다. 동시에 단발령 불만 세력의 소요에 대비하기도 했다.

헌병대는 동대문 못 미쳐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더니 광희문을 통해 광나루쪽으로 나아갔다. 계속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kmib.co.kr

<'국무총리 "일본은 쪽발이 아니다. 해동제국이다" 1~2편은 아래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