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1. ‘자라나서 무성하면 풀도 오히려 제거할 수 없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덩굴풀조차 처음에 베어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손 댈 수 없게 된다는 거죠. 잡풀의 싹을 제거해야 가을에 알곡을 얻을 수 있겠죠.
2.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 주인공 빅토르 안, 우리나라 이름 안현수(29)를 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우리 선수였던 안현수가 금메달을 러시아에 안겼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까지 안 선수 귀화 문제에 대해 한 마디 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라 토리노올림픽에서 3관왕에 올랐던 안현수. 그런데 그는 2011년 조국을 떠나 러시아로 귀화했습니다.
체육계의 고질적인 파벌 등의 문제가 귀화 이유였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3. 국민소득 2만4000달러 대한민국 출신인 안현수. 그는 몽골 출신으로 일본의 스모 영웅이 된 아사쇼류와의 출전기(出戰記)와는 첫 문장부터 다르다고 봅니다. 배가 고팠던 것도 아니고, 조국이 가난했던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종목이 모국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답답하죠.
4. 글로벌 시대, 개인은 자신의 삶을 영위할 국가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어느 날 경쟁자가 되어 모국을 상대로 싸운다면 뭔가 문제가 있죠. 마치 국군이 적국 군인이 되어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을 만드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미국 언론이 안현수 러시아 귀화를 두고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쿠바 대표로 뛴 꼴’이라고 비유했습니다.
5. 안현수가 조국을 떠난 것은 ‘무성한 풀’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치 외래종 돼지풀이 급격히 번식, 금강송을 타고 올라가 햇빛을 차단해 고사시킨 것과 같습니다. 금강송은 숭례문 복원에 제격인 대표적 조선소나무입니다.
6. 체육계 비리 사슬이 그같은 덩굴풀이 되어 쉽게 제거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고질적’이라고 표현 하나요?
7. 그러나 보니 안현수 관련 댓글은 분노와 기대감으로 차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제일 잘한 일이 빙상연맹 확실히 조사하라고 한 거다. 대통령 지시니까 흐지부지할 일은 없겠네’ ‘다 말해! 박 대통령 만나면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 ‘자식 귀화시키고, 시상식에서 애국가 아닌 다른 국가 부르는 자식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 졌을까’ ‘안현수법이 제정되어 체육계 부조리가 정화되길 바란다’
8. 한데 네티즌 기대에 부응해 제거될 잡초 수준이 아닙니다. 풀이 너무 자랐습니다.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법치국가에서 대통령 한마디로 그 거대한 ‘돼지풀 매트릭스(matrix)’가 제거될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체육계 수장은 대개 정치인이나 기업인 등과 얽혀 있으니 단지 체육계의 문제라고만 볼 수도 없고요.
9. 국민은 ‘앵그리버드’ 표정입니다. 그렇지만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안현수라는 걸출한 스포츠 스타로 인해 러시아 국민에게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주었다는 거죠. 나쁜 이미지보다 좋은 이미지로 기억 될 겁니다.
10. 돼지풀 제거. 우리 사회에 돼지풀처럼 자라난 생태계 교란종이 적잖습니다. 고질적이라 제거도 쉽지 않고요. 체육계만 그러겠습니까? 공기업 개혁도 대통령의 의지와 달리 쉽지 않겠죠. 고질적이니까요.
11. 그 매트릭스를 찾아 싹둑 가지를 쳐버리고 시멘트 발라 봉인해 버리면 될 텐데 좀처럼 모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검찰 등 수사기관의 뚝심 있는 수사를 바랄 밖에요.
12. 그렇다고 안현수 선수. 모국을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자식에게 못된 부모도 반면교사가 되어 그 자식을 성장시키니까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