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금강산호텔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눈물바다된 이산상봉 현장

오늘 금강산호텔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눈물바다된 이산상봉 현장

기사승인 2014-02-20 19:44:00
[쿠키 정치] 60여년간 꾹꾹 눌러왔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20일 오후 3시 이산가족 단체상봉 행사가 열린 금강산호텔은 한순간 울음바다가 됐다. 상봉 대상자들은 혈육을 만나 얼굴을 부비고 입을 맞추고도 가슴에 고였던 그리움이 쉽게 채워지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얼어붙었던 가슴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도는 듯한 모습이었다. 금강산호텔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통곡, 오열…눈물 그치지 않은 상봉장=강완구(81) 할아버지는 형 강정구(86) 할아버지를 안고 쓰러지듯 오열했다. 경기도 연천 휴전선 인근에 살던 형제는 6·25전쟁이 터지면서 동생은 국군, 형은 인민군에 징집됐다. 전쟁 탓에 형제가 하루아침에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된 것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60여년이다. 형제는 지난해 9월에서야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게 됐다. 휴전선 인근에 살았던 탓에 선친의 묘도 현재 민통선 안에 있다.

손기호(91) 할아버지는 딸 인복(61)씨와 외손자 우창기(42)씨를 얼싸안고 통곡했다. 1·4후퇴 당시 마루까지 나와 손을 흔들던 어린 딸이 어느새 노인이 돼 있었다. 손 할아버지는 세월이 내려앉은 딸의 얼굴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손 할아버지는 선물로 겨울옷과 생필품, 초코파이를 준비했다.

이범주(86) 할아버지는 남동생 윤주(68)씨와 여동생 화자(73)씨를 있는 끌어안고 흐느꼈다. 전립선암으로 항암투쟁 중인 이 할아버지는 “죽기 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상봉을 신청했다. 60여년을 꿋꿋하게 살아온 동생들을 보며 “혼자만 남한으로 왔다”는 그동안의 미안했던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부모님의 묘소와 기일을 물을 때는 서러움에 북받쳐 다시 한참을 울었다. 이 할아버지는 동생들을 주려고 선물 30㎏씩을 꽉 채운 가방 2개를 들고 왔다.

김영환(90) 할아버지는 아내 김명옥(87)씨와 아들 대성(65)씨를 만났다. 이번 상봉단 중 배우자를 만난 것은 김 할아버지가 유일하다. 전쟁 당시 혼자 먼저 피난을 내려올 때만 해도 60여년을 떨어져 있게 될지는 몰랐다. 김 할아버지는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내를 다시 만나고는 미안함에 흐느꼈다. 그는 남한에서 새롭게 가정을 꾸렸다. 남한에서 만난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세진(58)씨가 상봉에 동행했다.

◇부모형제 소식에 터져 나온 탄식=만나고 싶던 부모형제가 이미 세상을 떠나 그들이 남긴 혈육을 대신 만나는 상봉자들도 많았다. 상봉자들은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들이 남긴 새 가족을 만나는 반가움에 울음을 쏟아냈다.

김순연(80) 할머니는 이름까지 같은 언니 순연씨가 낳은 조카 이명철(60), 이명복(56)씨를 만나 볼을 맞댔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작은 순연’, 언니가 ‘큰 순연’으로 불렸다고 전해줬다. 상봉 신청 과정에서 언니와 형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남은 피붙이들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죽기 전에 북한 땅을 밟고 조카들을 만난 것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조카들의 얼굴에서 먼저 떠난 언니의 얼굴이 비치자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삼키기 어려웠다.

정희경(81) 할아버지도 조카 정철균(64)씨와 만나 세상을 떠난 부모형제 이야기를 나눴다. 헤어질 당시 2살이었던 조카는 어느새 노년에 접어들었다. 정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기일과 묘소에 대해 물으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이산가족 상봉이 처음 이루진 30년 전부터 상봉을 신청했다. 그때 상봉이 이뤄졌더라면 어머니와 형제들을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회한이 몰려왔다.

천종악(73) 할아버지도 난생 처음 보는 조카들과 상봉했다. 1·4후퇴 당시 부모형제는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 모두 남겨두고 장남인 자신만 먼저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부모님과 형제 4명은 전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됐다. 동생들이 남긴 조카 천상명(43)씨와 천상남(37)씨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죽더라도 금강산에서 죽겠다’ 응급차 타고 북으로=금강산은 최근 내린 눈으로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설경을 연출했다. 상봉 장소인 금강산호텔 옆에는 최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선군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는 석판도 놓여있었다.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들은 오전 8시20분쯤 강원도 속초를 떠나 금강산으로 향했다. 오후 12시58분쯤 금강산 관광지구 내에 온정각 휴게소에 도착했다. 감기 증세로 응급차를 타고 속초에 도착했던 김섬경(91) 할아버지는 구급차를 타고 상봉 장소로 이동했다. 김 할아버지는 “죽더라도 금강산에서 죽겠다”며 상봉장에 나왔다. 여동생과 조카를 만난 홍신자(84) 할머니도 구급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이동했다.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상봉 대상자도 19명이나 됐다.

배웅을 나온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80세 이상 고령이 대부분인 상봉단의 건강을 걱정하며 의료진에게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당부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 국민일보 쿠키뉴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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