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진보당 여성 테러리스트, 제1야당 대표를 만나다

[전정희의 시사소설] 진보당 여성 테러리스트, 제1야당 대표를 만나다

기사승인 2014-02-24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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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민주당은 용맹한 죽음을 택하라!(6) - 진보당 여성 테러리스트 석개, 제1야당 대표를 만나다

이튿날. 석개는 중참을 먹고 나철의 밀명에 따라 진고개 본정통쪽으로 내려갔다. 나철이 내민 밀서를 무명에 싸서 흰 저고리 소매에 단단히 넣고 천천히 걸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내 몇 걸음 못가 미투리 사이 눈이 녹아 버선을 적셨다. 눈발까지 날렸다. 다만 바람이 잦아들어 춥지는 않았다.

‘세상이 뒤집어 질라나. 입춘이 지났는데도 웬 눈발이 이리 굵담.’

석개는 혼잣말을 해가며 낮은 초가집 담을 이리저리 돌아 큰 길로 나갔다. 대설 덕분에 발걸음은 되레 편했다. 맨 땅이었을 경우 집집마다 똥과 수채통 물을 길바닥으로 버려 이런 미투리를 신고는 징검다리 건너듯 발걸음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김성규가 잘하는 일이 분명 있긴 있어. 조선 대중은 수백 년 수탈 속에 살아서 자의식이란 게 없어. 대한자강회(민주당 격)가 교육을 통해 위생 의식을 높이고 봉건 폐습을 일소코자 하는 건 맞네. 다만 그것이 지금과 같이 나라 자체가 일본 놈들과 오적들에 의해 패망할 지경이라면 그들의 생각이 전형적인 파벌의 산물이라는 거네. 안동김씨 60여년 세도 쫓아내고 자신들이 권력 잡겠다는 소리와 같아. 대중 위에 군림하겠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오혁에게 위생 의식을 얘기하던 나철이 떠올라 석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심지가 곧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자상했다.

‘나같은 섬 것이 언문을 깨치고 이 멀리 한양까지 와서 넓은 세상을 보게 되다니. 나철 어르신 아니면 턱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여. 지도(智島) 갯벌 파먹고 사시는 부모님께 더 없이 불효녀지만 나라를 위해 이리 나선 것 아시면 용서해줄 것이여.’

석개가 나철을 따라나선 것은 연모의 마음이 하루도 가시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수군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 나철의 유배 해제를 알렸을 때, 석개의 마음은 되레 유배되고 말았다. 석개는 몇날며칠을 먹지 못했다. 온 신경이 나철의 기침과 발자국 소리에 쏠려 있었다.

잠을 청하면, 옥양목 두루마리에 맥고모자를 쓴 나철이 나룻배 타고 섬을 떠나는 뒷모습만 보여 식을 땀을 흘리다 깨곤 했다.

그런 상사가 없었다. 그러던 석개는 어느 날 단정히 앉더니 명경을 조선통사 책 위에 놓고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리곤 가르마가 가지런히 했다. 가위를 든 석개는 어깨 부근 말총머리를 싹둑 잘랐다. 잘려진 머리카락을 한 움큼을 방바닥에 놓자 꼬인 머리카락이 뱀 뒤틀 듯 하면서 풀렸다.

‘잔풍진 세상이라는 것을 책에서 배웠다. 내 삶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여. 그분께서 세상에 연연해 잔풍을 두려워한다면 의가 따를 수 없다고 하셨어. 그 분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섬 것에게 과분할 따름이여. 죽어도 따라갈 것이여. 그분이 내게는 의가 아니고 뭐여.’

석개는 그렇게 지도를 떠났다. 그리고 비밀결사 감사의용단원(진보당 격)이 됐다.

*

본정통은 신천지였다. 높은 굽 신을 신은 제 나이 또래 여학생이 검정 통치마를 입고 양산을 쓴 채 또박또박 소리를 내며 걸었다. 살결이 고왔다. 하지만 그 여학생의 드러낸 종아리 때문에 석개는 마치 자신의 종아리가 드러난 양 얼굴이 붉어졌다.

“참말로…춥지도 않은개벼.”

석개의 고개가 절로 여학생을 따라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앞을 향해 보는데 각종 보석으로 장식한 아얌(외출용 모자)을 쓴 여인이 인력거에 앉아 진고개 내리막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비단 치마와 저고리로 한껏 뽐을 냈고, 빨간코 당혜를 신었다. 흰 속곳이 치마단 아래로 보이는데도 인력거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행인들은 그런 여인을 넋이 나간 채 보았다.

“요릿집 기생인가 본데 참 곱네. 오늘 밤 어느 왜놈 품에서 놀지…그 왜놈 참 팔자 한 번 늘어졌네.”

단발한 두 사람이 석개 옆을 지나며 그렇게 말했다.

석개가 본정통 입구임을 알리는 아치(지금의 서울중앙우체국 옆) 밑을 지나 소공동쪽으로 향했다.

‘이 편지를 소공동 천연당으로 가져가 김성규 어른에게 전달해라. 그 분께서 네게 뭘 건네 줄 것이니 가슴에 품고 곧바로 오도록 해라. 인파가 천연당 앞에 몰려 있을 것이야. 자연스럽게 행동하거라.’

집을 나서기 전 나철은 석개에게 이같이 신신 당부했다. 앞서 한양살이 동안 틈나는 데로 감사의용단 일원으로 단원들에게 암호해독, 독도(讀圖), 독약 제조, 독침 사용 법 등을 익힌 석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영국이란 나라말로 ‘테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게릴라전’이라는 말도 들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인의 신념이었다.

*

소공동 거리는 화실, 사진관, 양복점 등이 즐비했다. 요릿집이 골목 사이마다 들어가 있었고 그 요릿집에서 내건 홍등이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불을 밝히진 않고 있었다.

소공동 대로는 파석을 박아 우마차가 다니는데 지장이 없었고, 인도 또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신천지며, 신문명이었다. 석유가로등이 길 양쪽으로 멀대처럼 서 있었다. 남폿불 보다 수십 배 밝다고 했다. 소공동은 남산 동네와 달리 쌓인 눈조차 없었다. 누군가 깨끗이 치운 듯 했다.

천연당 앞에 이르자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천연당은 지난해(1907년) 개업한 사진관이었다. 인력거를 타고 온 고관대작과 귀부인들이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적벽돌 건물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석개는 인파를 헤치고 천연당 문을 밀고 들어섰다. 인파 대개는 조선 최초의 사진관이라는 천연당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구경꾼이었다.

“저…”

동그란 안경을 낀 사내가 석개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사내가 건조하게 말했다.

“김성규 회장을 뵈러 왔습니다.”

석개가 어미를 낮춰 말하자, 사내는 놀라는 표정으로 자세를 고쳤다.

“아, 예. 손님이 오실 거라는 얘기 들었습니다. 잠깐 여기 앉으시죠. 차를 드시겠습니까?”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석개는 얼떨떨해 하며 소파에 앉았다. 목화솜뭉치에 앉는 것처럼 푹신했다. 가까스로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석개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계속)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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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희 기자
jhjeon2@naver.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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