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아프니까 청춘! 예당 고학찬에게 꼭 배워야 할 소중한 것!

[친절한 쿡기자] 아프니까 청춘! 예당 고학찬에게 꼭 배워야 할 소중한 것!

기사승인 2014-02-25 13:14:00

못다한 인터뷰 뒷얘기

1. 프롤로그

서울 서초구에 예술의전당(예당)이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공연을 보러가는 곳입니다. 요즘 오케스트라나 오페라 티켓 가격이 정말 장난이 아니죠. 그러다보니 우연히 얻은 티켓을 갖고 예당에 달려가곤 합니다. 지난해 3월15일 재미난 분이 예당 사장이 됐습니다. 고학찬 사장입니다. 언론에서 임명당시 ‘친박’인사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냈다고 엄청들 비판하더군요. 알고보니 국가미래연구원이라는 대선 당시 박근혜후보의 씽크탱크 조직의 발기인이었답니다. 그런가 보다 했지요.

얼마 후 고사장이 신임인사차 편집국을 방문했습니다. 첫 만남이었지요. 그런데 베토벤이 왔나, 아이슈타인인가 싶었습니다. 하얀 곱슬머리에 바리톤 목소리를 들으니 ‘천상에 아티스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인상이 강해서 인터뷰 한번 해야겠다 싶어 ‘언제 한번 지면에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그후 편집국을 떠나 논설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올 초 고사장과의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2월초 인터뷰 요청을 했고, 지난 2월 6일 오후 1년 만에 예술의전당 5층 접견실에 찾아갔습니다. 여전히 정열과 의욕이 넘치더군요. 1947년생이니 올해 67세의 나이입니다. 취임 후 뭘 했냐고 묻자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노블회원제를 먼저 꺼냈습니다. 65세로 내리면 어떠냐 했더니 몇천명이 이미 가입해서 문제가 있을수 있어 우선 70세를 유지하려 한다고 합니다. ‘내 나이 67세인데 100세를 산다고 하는 요즘 난 명함도 못내민다’며 활짝 웃더군요.

서두가 좀 장황해졌습니다. 국민일보 2014년 2월 19일자 12면에 고학찬 사장의 인터뷰가 게재되었습니다. 물론 인터넷 국민일보 쿠키뉴스에도 전문과 프로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문지면이 적다보니
다 못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소개할까 합니다. 요즘 지치고 힘들다는 젊은 학생들이 꼭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 도전과 변화, 창의, 정의 젊은이들이 가져야 할 모든 것들을 고사장의 삶의 과정에서 간접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라인 인터뷰에는 쓰지 못한 뒷이야기만 추려서 소개합니다.

2. 고사장은 참 다양하고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PD에다 작가, 교수, 성악가, 대중가요 작사가, 연극인, 케이블방송, 문화CEO 뭐 안한 게 없더군요. 자유로이 창의적으로 산다는 평소 소신이 강한 분인 것 같습니다.

고사장은 1947년 제주시 용담동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도 성악가를 뺨칠 정도로 가곡과 클래식을 잘 부르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용두암 부근 초등학교에 입학해보니 아예 교실이 없더랍니다. 학교 부지엔 파란 보리만이 자라는 밭이더랍니다. 6.25 직후니 오죽했겠습니다. 교실을 짓기도 전에 학생을 뽑았으니 요즘 같으면 난리 났겠지요. 그러니 선생님은 하는 수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용두담에 매일 갈 수밖에 없었죠. 바닷가 바위에 앉아 뭘 가르치겠어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노래였습니다. 국어나 산수를 가르치려도 칠판이 있어야지요. 유일하게 노래하는 선생님 따라 노래를 하는 것이었답니다. 매일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게 기회였습니다. 고사장은 “어려서 가난한 제주어촌의 바닷가에서 제가 득음을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득음(得音)이란 판소리하는 사람이 시끄러운 폭포 밑에서도 자기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지요. 시끄러운 폭포소리를 이겨내야 비로소 득음을 합니다. 우연찮게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오히려 음악에 대한 소양을 키웠답니다.

3. 고사장의 재미난 이력 두가지를 소개합니다. 중학교 들어갈 때 음악과 문학 특기생이어서 월사금, 지금의 등록금을 안내고 대신 장학금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문학특기생이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입니다. 위에서 ‘이승만에 대해 매일 시를 써라’는 지시가 내려왔답니다. 당시 중학생들이 이승만을 뭘 알아야 시를 쓰지요. 대신 고사장이 매일 방과 후 혼자 남아 매일 급우 50명분의 시를 썼답니다. 선생님이 매일 위에 보고해야 하니까요. 하루 50개의 다르게 시를 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겐 자연스럽게 어린시절이 습작기간이 되었던 셈이죠.

고사장은 1965년 개국한 동양방송, 즉 TBC의 PD로 입사합니다. 그는 PD가 되었다가 다시 방송작가가 되어 연속극도 쓰고, 3년간 작가로 일도 했습니다. 대중가요 작사도 했지요. 어린시절에 가난 어촌에서 태어나 겪은 ‘득음과 습작’의 남다른 경험이 삶에서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답니다. 어릴 적 노래와 창작의 경험이 지금도 자기 몸에 남아 예당 사장으로 와서도 커다란 경험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TBC PD일때의 창의적 발상이 귀에 들어오더군요. 자신은 그저 선배들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계속 했답니다. 그가 처음 만든 ‘손오공’이란 라디오 프로가 국내 최초의 SF드라마입니다. 방송국 대선배들이 ‘SF가 뭐냐’고 할 정도 불모지였지요. 그래서 “미국에서 새로운 장르로 나와 인기를 끈다. 옛날에 손오공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토리가 우주공상과학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설명했답니다. 그는 작품 ‘손오공’으로 PD로서의 두각을 나타냈지요. 국내 최초로 음향효과(Sound Effect)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당시 방송국에는 모든 사운드가 라이브러리에 들어있었습니다. PD들이 그곳에서 필요한 음향을 골라 사용했지요. 하지만 종류가 많지 않았습니다. 아이 울음소리가 단 한개 있으니 모든 프로에서 울음소리가 똑같았습니다. 아침부터 10시반까지 아이 울음소리는 단 한가지였지요. 그래서 고사장은 아이가 배고플 때, 칭얼댈 때, 오줌 쌀 때 등 다른 상황의 아이 울음 소리를 다 만들어 사용했답니다. 또 손오공의 여의봉 커지는 소리도 만들었다지요. 선배들이 ‘무슨 여의봉이 소리가 나냐’고 하더랍니다. 손오공이 ‘아부라카 부라냐’ 하고 주문을 외우면 바로 여의봉이 커지는 사운드이펙트를 넣었습니다. 당시 최초로 전자오르간의 전자음향을 썼답니다. 자연음이 아닌 전자음이지요. 전자오르간의 건반을 손으로 슬슬 긁으면 소리가 나는데 그걸로 여의봉 커지는 소리를 만들었답니다. 라디오드라마 해설도 ‘제3자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주인공 손오공과 내레이터가 중간에 말섞음을 하는 최초 시도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레이터가 ‘손오공은 이제 옥황상제를 만나러 하늘로 올라 갑니다’라고 하면 주인공 손오공이 “해설자님, 벌써 올라가요? 해설이 너무 빨라 숨차요”라고 장외대화를 하는 것이죠. 그렇게 기존의 드라마 문법을 과감하게 깨버렸답니다. 손오공은 정말 최초의 SF드라마였고 대박을 쳤답니다. 고사장은 그때 같은 마음으로 지금도 창의와 자유, 도전을 합니다. 나이가 67세인데도 말입니다.

4. 고사장은 대학 겸임교수도 15년간 했습니다. 서울예전과 한세대 등에서 극작과 교수를 했습니다. 어느 날 학생들에게 숙제를 냈지요. 학생들에게 부부싸움 하는 장면을 한 페이지 정도 써오라했더니 어떤 학생이 기막히게 실감나게 잘 썼더랍니다. 그래서 ‘자네, 혹시 어린시절 엄마와 아빠가 다투었던 것을 보았나’ 했더니 ‘맞다’ 하더랍니다. 학생 말이 자기 부모가 하루도 빠짐없이 싸웠답니다. 그래서 고사장이 “불행한 어린시절이었지만 네가 그 누구보다도 잘 쓰지 않았냐. 아픈 과거 그것도 자산이다. 하나도 버릴게 없다”고 격려했답니다. 정말 어릴 적부터 살아가며 체험하는 모든 것이 좋든 나쁘던 나중엔 소중한 자산이 된다는 것이죠. 참 고마운 재산이라고 회고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는 모든 애환도 모두 소중한 미래자산이라는 이야기입니다.

5. ‘취미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항상 노래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라고 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마시길 좋아하는데 포장마차에서 노래하고 논다’고 합니다.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함께 있던 친구들이 다 갔더랍니다. 한잔 더하고 싶은데 대작할 사람이 없었던거죠. 그래서 나가서 어떤 사람이 지나가길래 ‘친구들이 다 가버려서 그러니 미안하지만 나랑 술 한잔 하고 갑시다’라고 했답니다. 그 사람이 빤히 ‘노인 베토벤’같이 생긴 외모를 보더니 선뜻 ‘하자’고 하더랍니다. 고사장은 ‘낯선 사람과 술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하다’고 평소 생각한답니다.

좌우명을 물었죠. ‘제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냐’ 가고가하(可高可下)라 하더군요. 무슨 이야긴가 했는데 사람이 살다보면 좀 높은 지위에 올라갈 때도 있는데 그렇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지 말자, 그리고 어쩌다 좀 잘못됐다고 주눅도 들지 말자, 그런 뜻이랍니다. 대개 인간이란 분위기가 좀 좋아지면 예전과 달라지지 않나요? 또 잘못되면 금세 비굴해지고요.

‘친구론’도 뭉클합니다. 주변에 가난한 친구들이 많답니다. 자기가 평생 밥을 사는 친구들도 많고요. 요즘 주변에서 ‘살 만하고 지위도 얻었는데 자꾸 저런 사람들 만나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 귀한 사람들이다. 지금 예당사장인 나에게 밥 먹자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내가 혹시 잘못되어도 저 친구에게 ‘나와라’하면 ‘그래’ 하고 아무 말 없이 나온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진짜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언제든 ‘밥 산다. 나오라’ 하면 한번도 어김없이 ‘그래. 나갈게’ 하는 친구들이랍니다. 저 역시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되더군요.

6. 뉴욕 재미교포들이 고사장에게 감사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뉴욕 라디오방송에 처음으로 한국어방송을 편성하도록 한 당사자입니다. 전두환 독재시절인 1980년 언론통폐합이 단행되었습니다. 계엄치하가 싫어서 그냥 미국으로 갔지요. 그런데 1981년 6월 뉴욕에 가보니 재미교포 1세들이 영어를 잘 못하더랍니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고 사는데 안타까웠던가 봅니다. 한국어방송이 없었지요. 고사장이 뉴욕시장에 대뜸 전화를 했습니다. ‘중국, 일본인들은 다 자국어 방송을 하는데 왜 한국어방송은 없냐’고 했답니다. 참 대차고도 한편 우스운 이야기죠. ‘지금 서울의 어느 방글라데시 청년이 서울시장실에 전화해 만나달라고 하면 만나주겠냐“고 고사장이 웃었습니다. 정말 그후 고사장이 ’에드워드 캇‘이란 뉴욕시장을 만났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뉴욕시장은 ‘아직까지 한국어 방송을 하겠다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당신이 처음이다”라고 하더랍니다. 뉴욕시장이 ’당신 아이디어는 좋다‘고 했습니다. 고사장은 “뉴욕시장 당신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발표해도 한국인들은 전혀 모른다. 알아들지 못하지 않냐. 방송을 하게 해주면 충분히 당신 정책도 방송해주겠다’고 설득했고요. 바로 허락되더랍니다. 그래서 뉴욕 라디오 프로그램 중 낮 12시부터 2시까지 2시간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답니다. 참 뭉클한 이야기죠.

그런데 교포들이 더 난리더랍니다. ‘무슨 돈이 있어야 방송할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한숨들이 나왔답니다. 방송출신인 고사장이 자신이 살던 원룸의 한 구석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중고전자시장에 나가 콘솔과 턴테이블, 마이크를 사서 ‘미니 방송국’을 만들었습니다. 아나운서 출신인 부인이 내레이션을 하니 인건비도 안 들었답니다. 매일 2시간 방송분을 집에서 제작해 뉴욕 라디오방송국까지 실어 날랐답니다. 한번은 릴 테이프를 갖고 가다 고물자동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방송펑크를 낼 수는 없으니 몇 Km를 직접 들고 뛰었다는 후일담은 뭉클합니다. 어느 날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드디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뉴욕 한국어 라디오 방송입니다’라고 방송이 나가니 세탁소나 푸드마켓 등 서럽게 살던 뉴욕교포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입니다. 창의적 발상을 하며 조국을 깨닫게 해준 이런 분이 진짜 애국자가 아닐까요.

7. 고사장이 우연히 1994년 한번 놀러 한국에 왔다가 주저앉았답니다. 때마침 한국에 케이블TV가 시작될 무렵이어서 삼성그룹 영상사업단에 제의를 받았답니다. 모두들 ‘미국에서 케이블TV 보냐’고 해서 ‘매일 본다’고 하자 곧바로 스카우트되어 15년 미국생활을 청산했답니다.

고사장은 회고합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벽이 높은지 말이죠. 자신이 33년을 한국에서 살다가 생판 모르는 미국에 가서 적응하며 15년간 살다왔는데 오히려 한국에 다시 와 적응하는 게 더 벽이 높음을 실감했답니다. 아직도 우리 분야 대부분이 그렇다고 합니다. 방송국에 갔더니 ‘라디오 하던 사람이 왜 텔레비전에 왔어’ ‘미국 갔던 사람이 왜 왔어’ ‘방송하던 사람이 공연에는 왜왔어’ 등등 진입장벽이 너무 높더랍니다.

1970년대 PD 당시 음악관련 프로 ‘내 마음의 노래’를 제작했답니다. 클래식 프로그램인데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뮤직비디오이지요. 무대에 가만히 서서 노래하는 게 아니고 가수가 산길도 걷고, 냇물도 건너고, 동산에도 올라서고. 일종의 그림이 있는 클래식프로그램입니다. 가수가 움직이면서 하는 노래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거치지 않으면 한국사회에서 클래식 가수로 성장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네요.

8. 말미에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제주 제1중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대광고를 졸업했답니다. 지금 임현정 코리아심포니 지휘자가 후배라고 자랑합니다. 대광고가 왜 음악인들이 많이 나오느냐. 미션스쿨이라 그렇답니다. 학교 다닐 때 교회음악을 많이 접한답니다. 어린 시절 보통 음악을 잘 접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노상 찬송을 부르니 나중에 음악의 소질이 남다르게 된다고 합니다. 홍난파, 현제명 선생 모두 교회에서 시작한 음악가들입니다. 한국교회가 초창기 음악계에 끼친 영향이 상당히 크지요. 고사장은 미국에 가서도 성가대를 하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9. 인터뷰에 다 싣지 못한 뒷얘기들을 올려보았습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말대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말이 맞습니다. 살다보면 오르고 내리고 울고 웃고 수많은 순간이 교차합니다. 누구나 그런 삶을 살지요. 또 누구나 말을 안할 뿐 다 그런 과정을 겪습니다. 젊은 학생들 힘들고 고되다고들 합니다. 결코 ‘나 혼자’ 겪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인생 그 자체가 대하소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혹 고되고 힘든 오늘 조금 위안이 될까 해서 고사장의 인터뷰 중 못다 한 뒷이야기를 올려보았습니다. 괜한 미화나 괜한 폄하가 없기를 기대합니다. 고학찬 사장에게 혹시 누가 되지 않았나 걱정됩니다.

김경호 쿠키뉴스 논설위원 겸 방송문화비평가 http://blog.daum.net/alps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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