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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민주당은 용맹한 죽음을 택하라!(7) - 친일 정권에 사분오열되는 야 3당, ‘국민’을 계몽 상대로만 봐
석개가 김성규로부터 넘겨받은 것은 개항장 목포항을 통해 들어온 폭탄 3개였다. 한때 전라도 무안감리로 목포 개항장으로 밀려드는 일본 상인들에게 조계지를 정해주고, 조선인 자생 상인 조직 사상회사(士商會社)를 관리해 일본 상권을 막으려 했던 김성규는 결국 일본 상업자본가 조직인 목포상업회의소의 방해로 감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에 압력을 넣어 퇴위 시킨 것이다. 이후 김성규는 대한자강회(민주당 격)를 조직해 정당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퇴위 반대 국민운동’을 전개하며 전국 정당화를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파 갈등이 문제였다. 목포 조계지 부두 노동자 조직인 도중(都中·민주노총 격)과 부산 도중이 대한자강회가 고문으로 앉힌 오가키 다케오, 친일매국단체 일진회에 대한 자강회의 어정쩡한 자세 등을 문제 삼아 김성규를 몰아세웠다.
목포와 부산의 도중 우두머리, 소위 ‘검찰’로 불리는 도중 우두머리는 판관 출신 노통서(친노계열 격)였다. 그가 도중을 장악하면서 대한자강회는 급격히 강온파 대립으로 이어졌다. 와중에 중부권 세력인 남궁억은 도중 세력과 함께 할 수 없다며 대한협회(새정치연합 격)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김성규를 압박했다.
도중은 강화도조약과 함께 부산이 강제 개항되면서 생겼다. 부산의 일본 부두 노동자와 맞서 조선인 부두 노동자가 결사체 도중을 조직했다. 그리고 자발적 개항을 단행한 목포에 도중의 노동자 두량군(斗量軍), 지계군(支械軍), 칠통(七桶軍) 등이 부산으로부터 건너왔던 것이다. 이들은 하역 등과 관련된 조선의 새로운 근대 직업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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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보름전 사동 명월관. 나철이 김성규로부터 어선(御膳)을 대접 받는 자리였다. 나철의 요청으로 이뤄진 자리였다.
“허위 선생의 창의군이 지평(양평)을 점령하고 양주를 향해 진격하고 있네. 놀란 일본 헌병대가 급파된 모양일세. 선생께서 지난해 일으켰던 의병이 연천, 적성(파주시), 철원 등을 장악했다는 소식이야. 경기 북부는 창의군이 죄다 관원과 헌병대를 몰아냈네. 대한자강회가 도성에서 궐기대회를 열어 받쳐 준다면 통감부를 밀어낼 수 있네. 나는 감사의용단(진보당 격)과 성동격서에 나서겠네.”
그 말에 김성규는 연신 화주(火酒)만 기울였다. 그가 잔을 놓으며 말했다.
“계몽되지 않은 민중을 가지고 무장한 일본놈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보나? 당장 내가 사상회사 일원으로 데리고 있던 도중 놈들을 보게. 그들이 대한자강회를 이용해 부두 파업을 일으켜 사상회사(조합)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네. 통감부가 한촌 목포에 이사청(통감부 지청)을 설치할 일이 뭐 있었겠나? 도중 때려잡으려고 그런 것 아닌가. 만약 대한자강회가 대한문 앞에서 궐기대회를 열면 즉시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걸세. 한양 대중은 대한제국 이전부터 부르주아 계급들이란 말일세. 대한자강회 지지층은 부르주아로 발아를 시작하는 중인층이네.”
이날 나철과 김성규의 담판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목포 조선인 상권을 관리했던 김성규가 밀수한 폭탄을 구해주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벨기에제 자동권총 한 자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성규로선 우정이자 동지애 때문에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을 석개가 천연당에서 건네받은 것이다. (계속)
전정희 jhjeon2@naver.com/ 국민일보 문화부장, 종교기획부장, 종교부장, 인터넷뉴스부장 등 역임. 인터넷 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을 국민일보 쿠키뉴스에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민족주의자의 죽음’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공저), ‘TV에 반하다’ ‘아름다운 전원교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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