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란 이름의 질병] 가난에… 홧김에… 좌절에… 막다른 선택… 죽음의 바이러스 ‘자살’

[자살이란 이름의 질병] 가난에… 홧김에… 좌절에… 막다른 선택… 죽음의 바이러스 ‘자살’

기사승인 2014-03-04 03:31:01

지난달 은경(가명·15·여)이는 진통제 두 상자를 까서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부모님이 4년 전 이혼한 뒤 내성적 성격에 마음을 닫고 지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 쳐다보는 게 일상이었다. 이날은 학원에 늦어 엄마에게 혼이 났고, 순간 응어리졌던 감정이 폭발했다. ‘아빠, 나 살기 싫어 약 먹었다.’ 짧은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병원에 실려가 정신을 차린 은경이를 두고 엄마는 “사춘기라 그렇다”고 했다. 의사가 정신과 진료를 권했지만 엄마는 서둘러 은경이를 데려갔다.

이운하(가명·53)씨는 지난해 말 경기도 자택에서 번개탄을 피웠다. 외환위기로 대기업에서 밀려났고 금융위기에 사업이 부도나 17억원의 빚더미에 앉았다. 리어카 끌고 노점도 해봤지만 패자부활의 문턱은 너무 높았다. 죽음을 고민하면서 가족에게 교통사고 보험금이라도 안겨주려다 애꿎은 누군가가 다칠 거란 생각에 포기했다. 번개탄 연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그에게 친구들은 “다 그렇게 산다” “죽을 용기로 더 살아보자”고 했다. 이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내를 잃은 지 3년. 큰아들 내외가 출근하면 김한영(가명·76)씨는 아파트에 홀로 남아 주로 누워 지낸다. 손에 익지 않은 IPTV 리모컨을 만지다 잠이 들고 아픈 허리가 쑤셔 일어난다. “아가, 유치원은 재미있니?” 식탁에서 손자에게 말을 붙여도 돌아오는 답은 짧기만 하다. ‘내 인생도 한때는 괜찮았는데….’ 지난해 위암 진단을 받고는 고된 치료 대신 아내 곁에 가려 했다. 실패로 끝나 실려 간 병원에서 뒤늦게 달려온 아들이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닌데….”

우리는 독감에 걸릴까봐 예방주사를 맞고 열이 나면 병원에 간다. 암에 걸리지 않으려 술·담배를 끊고 그래도 암 진단을 받으면 항암치료를 시작한다. 이렇게 예상되고 만연한 질병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정부와 사회가 예방·치료 시스템을 구축한다.

한국에서 자살은 독감이나 암과 다를 바 없는 치명적 ‘질병’이다. 2012년 1만41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30대 사망 원인 1위, 40~50대 2위를 차지했다. 2010년 인구 10만명당 33.50명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3.29명의 2.5배를 넘어섰다. 우리는 2003년 이후 자살률 세계 1위의 서글픈 타이틀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독감이나 암처럼 자살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시스템을 이제는 갖춰야 한다. 노르웨이 등 선진국은 자살을 ‘예방 가능한 재난’으로 여겨 1980년대부터 자살예방사업에 뛰어들었다. 2000년에는 국제자살예방협회(IASP)도 설립됐다.

우리 정부는 2004년 ‘국가 자살예방 5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자살 시도자를 지역사회 정신보건센터와 이어주는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사후관리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자살 재시도율이 줄면서 자살도 예방·치료가 가능한 질병임이 확인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집세와 공과금이 밀려 동반 자살한 ‘세 모녀’의 아픔은 자살이란 질병에 취약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국민일보는 ‘자살이란 이름의 질병’ 시리즈(2부 10회)로 자살 예방과 치료의 현주소와 대안을 보도한다. 자살 보도의 악영향을 막기 위해 모든 기사는 박종익 중앙자살예방센터장(강원대병원 정신의학과 교수)과 민성호 원주세브란스병원 정신의학과장의 감수를 받았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속보유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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