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스몰토크] 화재로 인한 '교복 여고생' 참사…화마 보다 더한 악플러

[전정희의 스몰토크] 화재로 인한 '교복 여고생' 참사…화마 보다 더한 악플러

기사승인 2014-03-10 11:46:00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1. ‘죽음과 싸우고 있는 불행한 뱃사람의 조난을 언덕 위에서 구경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로마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책 ‘만상론(萬象論)’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19세기 인물로 ‘악의 꽃’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잔학성과 향락은 동일한 감각이다”라고 했지요.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사디즘(sadism)을 설명할 때 인용되곤 합니다.

2. 9일 아침 충남 예산 오가면의 한 주택에서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습니다. 충남 소방본부와 예산경찰서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26분께 그 주택에서 불이나 한 여고생이 숨졌습니다. 그 집에 살던 박모(17) 양으로 고등학교 새내기입니다.

화재 당시 박양은 할머니와 함께 신속히 대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손녀딸의 새 교복을 빼내야 한다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었고, 박 양은 그런 할머니를 구하러 뒤따라 화마 속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거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할머니는 빠져 나왔으나 박 양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거죠.

3. 박 양은 할머니, 아버지 이렇게 셋이 살았습니다. 박 양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 집을 나가 할머니가 대신해 키웠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소작농이고요. 이날 박 양의 아버지는 일찍 일하러 나갔다가 참화 소식을 들었습니다.

4. 이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은 댓글로 애도했습니다. ‘정말 눈물나네. 가슴 아파.’ ‘아 신이시여…할머니의 마음을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하늘나라 가서 편히 쉬길’ 등의 표현으로 조의했습니다. 할머니가 손녀의 새 교복을 찾으러 뛰어든 것을 보고 비싼 교복값 문제에 대해 분개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5. 그런데 열에 네 명 정도가 ‘혹시 알아? 불길 속에서 할머니가 손녀를 배신 때렸을지?’ ‘할머니가 너무 젊으시네. 따님이 결혼을 일찍 하셨나 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교복의 명복을 빕니다’ ‘말리고 제재할 어미가 없으니 이런 상황 나오는 거지’
‘교복 살 돈 없으면 왜 사냐?’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냅니다. 지면에 담을 수 없는 극한 얘기는 걸러낸 겁니다. ‘독사의 자식들’ 같습니다.

6. 이런 악플러들에 대해 네티즌들이 통상 “‘초딩’(초등학생이란 속어) 방학했냐?”라고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이제 그 수준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소위 극단적 견해를 놀이 삼아 밝히는 ‘일베 현상’이 마치 파시즘처럼 우리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7. 국민일보가 지난해 12월 악플로 형사처벌을 받은 100명을 분석한 결과 어린이나 청소년이 악플을 달 것이란 통념과 달리 40~50대가 절반을 차지해 충격을 주었습니다. 2011~2013년 분석 결과입니다. 100명 중 73명은 남성이었고 직업별로는 무직(28명)이 많았습니다. 회사원·자영업자(23명), 전문직(8명), 학생(7명), 주부(5명), 공무원(4명), 종교인(2명) 순이었습니다.

8. 악플러들도 영화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것처럼 본시 평화를 사랑하는 선량한 이들이었을 겁니다. 입시와 취업으로 인한 스트레스, 그리고 위선을 강박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9. 영화에서 괴물이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악마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나를 행복하게 해다오. 그러면 나도 다시 착해질 수 있다.” 경쟁을 강요당하고, 경쟁에 시든 이들이 악플러라 믿습니다.

10. 만물의 본성은 선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독점이 늘어날수록 약자는 체내 독성을 품습니다. 그 독성을 품은 악플러들은 사회 시스템에 의해 선해질 수 있을 겁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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