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아직도 쫓겨나는 임차상인들… '노후의 꿈' 무너진 베이비붐 세대 부부 이야기

[기획] 아직도 쫓겨나는 임차상인들… '노후의 꿈' 무너진 베이비붐 세대 부부 이야기

기사승인 2014-03-24 21:36:00
[쿠키 사회] 일부에서 건물주와 임차상인의 상생 노력이 시작됐지만 여전히 많은 임차상인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며 힘겨운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담화에서 “임차인이 억울하게 삶의 기반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박 대통령의 약속과 거리가 멀다. 지난주 서울 연희동에서는 안락한 노후를 꿈꾸며 카페를 차린 은퇴 부부가 전 재산을 잃고 거리에 나앉았다.

처참하게 부서진 노후

조용한 주택가 단독주택. 일부를 카페로 개조해 단골손님과 커피를 나누고 가끔 찾아오는 손주의 재롱을 보는 나날…. 이런 노후를 기대했던 김인태(53) 최성희(58·여)씨 부부의 소박한 꿈은 불과 1년여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베이비붐 세대의 치열했던 삶을 정리하고 전 재산을 투자한 서울 연희동 카페 ‘분더바’. 독일어로 근사하다는 뜻의 카페가 부부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김씨 부부는 지난 17일 서울 연희동 2층 단독주택에서 쫓겨났다. 강제집행은 법원 집행관과 용역직원 70명에 의해 1시간 만에 끝났다. 1층과 정원은 분더바, 2층은 부부의 집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제가 가진 전부예요. 가재도구며 이불, 심지어 속옷까지 쓸어갔어요. 속옷이라도 챙기게 해달라고 매달렸는데….” 최씨는 호흡곤란 증세로 길바닥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자꾸 자살 얘기를 해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다.

김씨 부부는 대통령 담화를 들으며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고 했다. 김씨는 “(강제집행 당하고 나니) 정치라는 게 참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년쯤에야 대책이 나온다던데…”라고 했다. 찜질방에서 자며 분더바 앞에 천막 치고 농성하려던 계획도 여의치 않게 됐다. 구청에서 20일 오전 부부가 설치한 천막까지 철거했다. 천막이 철거되던 날, 힘겹게 버티던 김씨마저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다.

임대료 두 달 밀리자 곧바로 계약해지

김씨 부부는 지난해 1월 분더바를 열었다. 단독주택을 빌려 1층을 카페로 꾸미는 데 약 2억원이 들었다. 용도변경·주택개조·인테리어에 1억원, 초기운영비·시설보수비 4500만~5000만원,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440만원. 계약기간은 2년으로 했다. 최씨는 “건물주가 ‘우선 2년 계약하고 여기서 오래오래 장사하라’고 해서 들어왔다”며 “겨우 2년 할 거면 전 재산 들여서 용도변경하고 이렇게 개조까지 했겠나”라고 말했다.

유동인구가 적어 처음엔 고전했지만 깔끔한 정원과 인테리어가 예쁘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자리를 잡아갔다. 강남에서 찾아오는 단골손님도 생겼다. 그러다 김씨 건강이 악화됐다. 장사를 제대로 못하는 날이 생겼다. 건물주와 갈등도 있었다. 김씨 부부는 대문과 담을 허물어 트인 카페로 만들려 했지만 건물주 반대로 그러지 못했다. 최씨는 “꽉 막힌 구조가 장사에 방해가 됐는데 여기서 오래 장사해야 하는 처지라 제대로 항의도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 건강 문제로 결국 5·6월 임대료를 내지 못했다. 건물주는 입금일인 6월 30일 임대료가 들어오지 않자 즉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부부가 내용증명을 받은 건 7월 8일이다. 놀란 김씨가 급전을 빌려 1개월분을 냈지만 건물주는 명도소송에 들어갔다.

난생 처음 소송을 당한 부부는 결국 건물주에게 다 포기하고 나갈 테니 투자비 일부라도 건지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권리금 8000만원에 카페를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건물주는 부부의 ‘점포 양도’를 허락하지 않고 강제집행을 했다.

김씨 부부는 건물주가 아들에게 이 카페를 주려고 자신들을 내쫓았다고 의심한다. 건물주 아들이 “분더바가 내 카페 됐다”고 얘기하고 다녔으며 페이스북에도 그런 글과 사진을 올렸다는 것이다. 김씨는 “용도변경도, 홍보도 우리가 다 해 놨다. 건물주 입장에선 인테리어만 좀 고쳐 직접 카페를 하거나 권리금 받고 다른 이에게 넘길 수도 있다. 임대료 두 달 밀렸다고 내쫓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서인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건물주 아들은 “페이스북 게시물은 친구와 운영하는 다른 카페의 사진”이라며 “이 건물에서 카페를 운영할 계획이 없고 당분간 비워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상가세입자협회(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상임고문인 김남주 변호사는 “주거지에서 아무 대책 없이 쫓아낸 건 지나친 처사고 인권침해 소지도 있다”며 “민사집행법이 미비해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몬다”고 말했다.

임차상인들은 ‘투쟁’ 중

상가세입자협회에는 김씨 부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임차상인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권구백 대표는 “매일 2~3건씩은 접수된다”며 “지난달 220명이던 협회 회원이 한 달 만에 330명이 됐는데 대부분 피해 상담 후 가입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중국 관광객을 상대하는 제주시 연동 바오젠거리(차 없는 거리) 임차상인들도 그런 경우다. 강제집행 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 김호산(35·여)씨는 2012년 권리금 9000만원, 보증금 650만원, 1년 임대료 850만원에 이 거리의 점포를 인수했다. ‘코끼리옷가게’를 차려 여성복을 팔아오다 지난해 2월 건물주가 바뀐 지 석 달 만에 ‘나가달라’는 내용증명을 받았다.

그는 “전 건물주가 상인들 모르게 건물을 팔았다. 옷가게 점원을 하다 처음 내 가게를 차린 터라 내용증명을 받고 심장이 떨렸다”고 말했다. 만삭의 몸으로 힘겹게 법정 다툼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지난 13일 법원 집행관들이 들이닥쳤는데 같은 처지의 주변 임차인들이 힘을 합쳐 몸으로 막았다. 같은 건물에서 식당을 하는 김현지(33·여)씨는 “이 건물 8개 점포 중 7곳이 같은 처지에 몰려 있다”며 “우리는 전 재산을 들였는데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도경 박세환 기자 yido@kmib.co.kr
이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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