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7월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을 총리 서리로 지명했다.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 서리였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3차례의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의혹, 장남의 이중국적 문제 등이 불거졌다. 장 총리 서리는 “모든 것을 시어머니가 주관했다”고 해명했지만 오히려 여론의 질타만 키웠다. 결국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됐다.
김 대통령은 한달 뒤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을 총리 서리로 임명했다. 전국적인 월드컵 열기에 청와대 내에서는 ‘히딩크형 총리론’이 대두됐고 젊고 참신하면서 경영 마인드가 있는 새 인물에 대한 요구가 거셌다. 하지만 장 총리 서리 역시 10여건의 부동산 투기와 자녀의 강남 위장전입 의혹이 터졌다. 장 총리 서리는 “아이들을 좋은 곳에서 교육시키려 했던 생각에서 한 일”이라고 시인했고 역시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노무현정부 시절엔 이헌재 경제부총리, 김병준 교육부총리, 김명곤 문화부 장관 등이 검증 단계에서 불명예 퇴진했지만 총리 후보자가 낙마한 경우는 없었다.
이후 이명박정부 시절인 2010년 8월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중도 사퇴했다. 이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 후임으로 ‘40대 총리’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과 선거자금 불법 대출 문제 등이 알려져 고배를 마셨다. 김 전 지사는 “국민의 믿음과 신뢰가 없으면 총리로 인준된다 하더라도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 청문회가 끝나고 4일 뒤 스스로 물러났다.
박근혜정부 첫 총리 지명자였던 김용준 전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언론에서 부동산 투기와 자녀 병역면제 의혹 등이 잇따라 터지자 청문회도 열리기 전에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안대희 전 대법관 역시 총리 지명 후 전관예우 비판이 거세게 일자 엿새 만에 전격 사퇴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