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는 복싱보다 잔인한 운동

골프는 복싱보다 잔인한 운동

기사승인 2016-04-04 14:24:57
"전통에 따라 캐디

언니 등과 18번홀 연못에 뛰어드는 우승 세리머니를 펼친 리디아 고. AP뉴시스"

사각의 링. 그 안에는 두 명의 파이터와 한 명의 레퍼리 밖에 없다. 믿을 것은 오직 자신 뿐. 밖에서 들려오는 코치의 조언은 그저 메아리처럼 아른거릴 뿐이다. 그래서 링은 곧잘 정글에 비유된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골프도 잔인함에서는 복싱 못지않다. 치열한 주먹질 대신 침묵이 오갈 뿐. 그 침묵은 암살자처럼 상대를 윽박지른다. 심약한 자는 제 풀에 나가떨어진다. 주먹 한번 쓰지 못하고 침몰하는 점에서는 골프가 복싱보다 더 잔인하다. 무자비하다.

4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미라지의 미션힐스CC 다이나쇼 코스(파72·6769야드)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총상금 260만 달러) 최종일. 태국의 아리야 주타누간은 3홀을 남기고 2타차 단독 선두를 질주하고 있었다. 전날 1타차 공동 2위로 최종 라운드를 시작했지만 롱퍼팅이 잇달아 들어가며 4타를 줄이고 있었다. 태국 선수로는 LPGA 대회 첫 우승이 아른거렸다. 바로 앞 홀에서는 세계랭킹 1위 리디아(뉴질랜드)와 부상에서 돌아온 전인지(22·하이트진로)가 나란히 보기없이 버디 2개로 주타누간을 2타차로 추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골프의 잔인성이 발휘된 것은 16번홀부터. 자신이 단독 선두라는 것을 리더보드에서 읽은 듯 주타누간의 샷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균 280야드 넘게 날리는 장타자여서 이번 대회에서는 아예 드라이버를 빼놓고 나온 주타누간이 16번홀(파4)에서 처음으로 3퍼트로 보기를 적어낸 뒤 표정이 어두워졌다. 17번홀(파3)에서 티샷을 그린 왼쪽 벙커에 빠뜨리면서 또 보기가 나와 리디아 고, 찰리 헐(잉글랜드)과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전인지는 16번홀 그린 옆 러프에서 친 세 번째 샷미스로 보기를 범해 우승권에서 멀어진 상황.


앞선 홀 18번홀(파5)에서 3온 작전으로 나온 리디아 고가 여유 있는 탭인 버디로 1타차 단독 선두가 됐을 때 1타 뒤진 주타누간은 이 홀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었다. 하지만 티샷이 왼쪽으로 휘며 워터해저드에 빠지면서 보기를 범해 10언더파 단독 4위로 경기를 마쳤다.


리디아 고는 경기 후 “17번홀에서 리드보드를 보면서 아직도 기회는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리디아 고는 19세 소녀답지 않은 두둑한 배짱으로 이날 보기 없이 버디 3개로 3타를 줄인 반면 주타누간은 16~18번홀에서 3연속 보기를 범하며 자멸했다. 주타누간은 이번 대회 초반 57개홀에서 보기가 3개에 그친 반면 나머지 15개홀에서는 4개의 보기를 범해 첫 우승이 무위에 그쳤다.

숱한 위기를 넘으며 조용히 숨통을 조여온 리디아 고는 박인비처럼 또 한명의 ‘침묵의 암살자’가 돼 있었다.


이날 18세 11개월 10일인 리디아 고는 최연소 메이저 2승의 주인공이 됐다. 종전 최연소 메이저 2연승은 박세리(하나금융그룹)의 20세 9개월이었다. 시즌 2승과 함께 통산 12승은 덤이었다. 18번홀 버디로 전인지는 1타차 공동 2위에 랭크되면서 한 달여 공백을 무색케 했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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