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롤드컵은 삼성 갤럭시의 우승으로 끝났다. 지난해 가을 SK텔레콤 T1과의 풀세트 접전 끝에 석패, 눈앞에서 트로피를 놓쳤던 이들은 1년 뒤 같은 무대에서 난적을 상대로 3대0 완승을 거두며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플레이-인 스테이지의 최초 도입부터 4강에서 성사된 2번의 한중전 대결 그리고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까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남겼던 대회였다. 쿠키뉴스는 이번 롤드컵을 향로, 왕위 계승, 제어 와드, 전설 그리고 눈물 총 5개의 키워드로 압축해 되돌아봤다.
1. 향로
이번 롤드컵 최고 화두는 ‘불타는 향로’였다. 아이템 효과가 너무 강력한 탓에 게임 밸런스가 붕괴됐고, 자연스레 원거리 딜러 캐리 메타가 도래했다.
대회 참가팀들은 불타는 향로를 최대한 빨리 구매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마련해냈다. 지난 8월 아프리카 프릭스 바텀 듀오가 고안해낸 원거리 딜러 ‘고대 유물 방패’ 스타트 전략도 그 일환이었다. 대회 본선에 접어들자 이 전략이 메타의 일부분으로 녹아들었을 만큼 불타는 향로는 경기 내용에 큰 변화를 줬다.
밴픽에도 영향력을 끼쳤다. 메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챔피언 칼리스타는 대회 전 경기(80세트) 모두 금지돼 전무후무한 100% 밴 기록을 남겼다. 서포터 중에서는 잔나가 44번 선택, 32번 금지로 95%의 밴픽률을 달성했으며 룰루 역시 47번 선택 28번 금지로 94% 밴픽률을 기록, 불타는 향로의 사기성을 대변했다.
반대로 메타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아왔던 이즈리얼은 원거리 딜러로 단 1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무난함의 대명사 시비르와 애쉬도 각각 3번, 1번 등장에 그쳤다. 폭발력이 부족해 원거리 딜러 캐리 메타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팀 내 원거리 딜러 선수 기량에 따라 팀 성적도 갈렸다. 미드라이너와 정글러가 팀 중추를 담당하는 대만 맹주 플래시 울브즈는 조별 예선에서 1승5패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조기 귀국했다. 원거리 딜러 ‘베티’ 루 유훙이 대규모 교전서 제 몫을 해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바텀 듀오 기량이 눈에 띄게 하락한 SKT 역시 향로 메타를 100% 흡수하지 못해 고전했던 팀 중 하나였다. 대규모 교전 단계에서 팀의 주포가 돼야 하는 ‘뱅’ 배준식의 부진이 뼈아팠다.
반면 전통적으로 원거리 딜러 캐리를 선호했던 중국 지역 팀은 이번 대회 최고 수혜자였다. 팀 월드 엘리트(WE)와 로열 네버 기브업(RNG)은 각각 원거리 딜러 ‘미스틱’ 진성준과 ‘우지’ 지안 즈하오에게 각종 자원을 투자해 조별 예선 조 1위에 올랐고, 4강 진출의 성과를 거뒀다.
2. 왕위 계승
“SK텔레콤 T1 왕조가 끝났습니다. 새로운 왕 삼성 갤럭시를 환영해주십시오”
결승전에서 삼성 갤럭시가 SKT 넥서스를 3번째 부수던 순간 외국 해설진의 외침이었다. 영원할 것 같던 SKT 천하가 끝났다. 지난 2015년부터 각종 국제대회 트로피를 싹쓸이했던 이들은 롤드컵 본선 다전제 첫 패를 기록함과 동시에 삼성 갤럭시에게 왕좌를 내주었다.
경기 당일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둘러대기엔 양 팀 간 기량 차이가 확연했다. 일부 라이너들의 경쟁력 상실 등 서머 스플릿 2라운드부터 대두됐던 문제점이 끝끝내 봉합되지 않았고, 결국 롤드컵 결승전 0대3 완패로 이어졌다.
미드라이너 ‘페이커’ 이상혁을 제외한 전 라인이 경쟁력을 잃었음을 재차 확인한 상황. 늘 1등만을 노려왔던 SKT로선 이번 오프시즌 대규모 리빌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반면 삼성 갤럭시는 지난 대회 동안 가파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별 예선에서는 중국 RNG에게 2패를 헌납하며 다소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8강전부터는 총 9승1패를 기록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팀으로 거듭났다.
자연스레 각 포지션 ‘세계 최고’ 타이틀도 삼성 선수단이 차지했다. 특히 탑라이너 ‘큐베’ 이성진은 대회 내내 상대방과의 라인전에서 판정승을 거두면서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고 탑라이너’가 됐다.
하지만 이성진은 우승 후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 탑라이너보다 세계 최고의 팀이 된 게 뿌듯하다”고 밝혔다. 개인의 영예보다 팀으로서의 강함을 우선시하는 월드 클래스 선수들. 삼성이 진정 강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앞서 SKT의 숙제가 리빌딩이었다면 삼성의 숙제는 기존 선수단 지키기다. 이듬해까지 미래를 약속한 이성진과 미드라이너 ‘크라운’ 이민호를 제외한 선수단 전원과의 계약이 오는 20일 만료되기 때문에 이들의 이번 오프시즌 목표는 ‘현상 유지’가 될 전망이다.
3. 제어 와드
조별예선에서 2패를 헌납하며 크게 휘청거렸던 삼성이 8강 이후 완전히 다른 팀으로 태어난 건 제어 와드 구매 개수와도 연관이 있다. 이들은 8강 롱주 게이밍전부터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제어 와드를 대거 구매, 시야 장악에 힘썼다. 상대와 1대1 라인전을 치러야 하는 라이너들마저도 아이템 구매를 포기하고 제어 와드를 구매했을 만큼 시야 장악에 중점을 뒀다.
삼성은 ‘앰비션’ 강찬용과 ‘큐베’ 이성진을 활용한 1-3-1 스플릿을 선호하는 팀이다. 정석적인 전략이지만 롤드컵 메타에서는 적합하지가 않았다. 한 프로게이머는 롤드컵 유행 메타와 관련해 “1-3-1 스플릿처럼 복잡한 운영을 하기가 어렵고, 한 줄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메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삼성이 조별예선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던 건 이러한 메타 적응의 영향도 있었다.
삼성은 압도적인 시야 장악을 토대로 자신들의 장기를 부활시켰다. 상대 정글 깊숙이 와드를 설치한 뒤 싸우고 싶을 때만 싸우는 ‘이기적인’ 운영 전략을 선보이며 일방적으로 득점한 것이다. 여기에 노련하고 꼼꼼한 ‘앰비션’ 강찬용의 상대 순간이동 체크가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최우범 감독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조별예선 이후 시야 장악 전략에 변화를 줬음을 인정하면서 “와드 하나가 게임을 끝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삼성은 결승 상대가 3세트 도합 91개 제어 와드를 구매할 동안 총 149개를 구매했다. 특정 포지션에 치중되지 않게끔 공평하게 인당 10개가량을 구매했다. 골드로 환산하면 무려 4300골드를 와드 구매에 더 투자한 셈. 시야 싸움에서 압승을 거두는 건 당연한 보상이었다.
물론 이처럼 대량의 제어 와드를 구매할 수 있었던 건 선수단 기량이 출중해서이기도 했다. 맞라이너가 ‘증폭의 고서’나 ‘롱소드’ 같은 하위 아이템을 한 개씩 더 구매한 상황에서 라인전을 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전제되기 때문이다.
4. 전설은 죽지 않는다
대회 테마곡 ‘전설은 죽지 않는다’처럼 베테랑 선수 활약이 빛났던 대회였다.
국내 최고참 프로게이머 ‘앰비션’ 강찬용은 5전6기만에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지난 2012년 아주부 블레이즈 소속으로 데뷔한 그는 2015년까지 단 1번도 롤드컵 본선무대를 밟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였다.
하지만 지난 2016년 삼성 이적 이후부터 팀과 함께 기량이 급상승, 2회 연속 롤드컵에 진출하는 성과를 이뤘고 더 나아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는 우승 후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오랫동안 최고는 못 됐었다”고 평가했지만 결국 2017년의 ‘최고’로 남았다.
역대급 원 맨 캐리를 선보이며 팀을 결승까지 이끈 ‘페이커’ 이상혁도 ‘살아있는 전설’다웠다. 비록 결승 무대에서 강찬용과 삼성을 넘지 못해 무릎을 꿇었지만 8강 미스핏츠전과 4강 RNG전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역사에 길이 남을 슈퍼 플레이를 연달아 펼쳐 이름값을 해냈다.
외국의 전설들도 좋은 모습을 보였던 대회였다. 지난 2011년 1번째 롤드컵부터 꾸준히 얼굴을 내비친 탑라이너 ‘소아즈’ 폴 부아예는 베테랑답게 배짱 두둑한 스플릿 푸시로 팀을 8강에 진출시켰다.
이밖에 롤드컵 2회 준우승 기록을 보유한 중국 대표스타 ‘우지’ 지안 즈하오도 SKT 상대로 풀 세트까지 가는 명승부를 연출하는 등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5. 눈물
‘페이커’ 이상혁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데뷔 이후 단 1번도 과격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그였으나 결승전 패배 직후 키보드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랫동안 패배에 대한 분을 삭이지 못하는 이상혁의 모습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팬들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1번째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게임을 치르며 팀을 결승까지 이끈 그였기에 마지막 문턱 앞에서의 좌절이 더욱 씁쓸했다. 당시 베이징 내셔널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던 중국 현지 팬들도 그 순간만큼은 ‘페이커’를 연호하며 위로를 건넸을 정도였다.
2번째는 안도감이었다. 수년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그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가장 강한 승부욕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2013년부터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더 강해져 돌아왔던 이상혁이 프로게이머 커리어 최악의 좌절을 맛봤다. 절치부심한 그가 다음 시즌 어떤 활약을 보여줄까. 안도감과 동시에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윤민섭 기자 yoonminseop@kukinews.com
사진=라이엇 게임즈 플리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