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덕구'이순재 "예전 연극 무대엔 女 관객 없었다 … 가족의 개념 바뀌어"

[쿠키인터뷰] '덕구'이순재 "예전 연극 무대엔 女 관객 없었다 … 가족의 개념 바뀌어"

기사승인 2018-04-05 00:00:00

‘덕구’(감독 방수인)에서 배우 이순재가 맡은 덕구 할배는 대단히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희게 센 머리를 염색할 짬도 없어 반만 검은 머리를 대충 두고, 손자에게 로봇을 사주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고깃집 불판을 닦는 덕구 할배.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평범한 덕구 할배를 두고 최근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순재는 “가장 어려운 역”이라고 평했다. 자기 주장도 없고, 화도 안 내는 인물이야말로 가장 연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극 ‘햄릿’에 보면 호레이쇼라는 인물이 있어요. 장면마다 안 나오는 곳이 없는데, 항상 메인 흐름을 끌어가진 않아. 그런데 그게 가장 어려워요. 그런 역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가 배우의 역량을 평가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인물들의 중간에서 쿠션 역할을 하는데 흔들리지 않고 자기 몫을 다 하는 평범한 역이야말로 가장 힘들지.”

이순재는 ‘덕구’에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출연 분량이 적은 것도 아니다. 주연이고, 영화 전체를 꿰다시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노년의 나이에도 작품 주연을 맡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작품의 주연이 되고, 중심축이 되기는 참 어려워요. 사회 전체가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할아버지 역이 중요한 영화가 몇 편이나 있겠어요? 노인들이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듯 노인 배우들도 그렇지. 물론 주연 욕심만 내서 출연을 결정한 건 아니에요. 가족의 사랑을 다룬다는 의미도 있고, 요즘 다문화가정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그걸 극복할 수 있겠다 생각해요. 불행한 가정도 많지만 대다수의 다문화가정이 그런 오해 때문에 더 힘들어질 수 있거든. 요즘 박스오피스가 블록버스터나 비판 영화가 주류인데, 이런 따뜻한 영화가 나와서 관객들이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싶었고요.”

그가 최근 연극에 매진하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다. 2016년 말부터 연극을 쭉 해온 그는 많은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노인 배역이 제 몫을 다 할 수 있다는 방증을 몸소 해왔다. 작품을 끌어올리는 데 보탬이 되고 싶고, 그의 말을 빌자면 '돈이나 받아먹는 원로배우'라는 말을 듣고싶지 않다는 것이 이순재의 의지다.


‘덕구’ 속에서 이순재는 손자 덕구를 홀로 키우며 덕구를 부족함 없이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람 다 조손가정이자 다문화가정의 일원. 관객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가족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순재는 “예전과 가족이나 가정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졌다”며 영화 속 덕구의 상황에 관해 관객들이 편견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현실에서 가정이라는 것의 의미는 예전과 달라요. 우리 때는 남자들이 수입 관리도 하고, 가끔 색시 몰래 비자금도 만들고, 애 업거나 부엌이라도 들어가라고 하면 소스라쳤죠. 그렇지만 지금은 여권이 예전보다는 많이 신장되면서 여자들 사회 진출이 늘었고, 가정의 의미도 점점 변했지 않아요? 그러면 가정에서 남녀 역할도 달라지게 마련이죠.” 가장 기본적인 부부관계만 해도 수만가지가 달라지는데, 더 이상 옛날 같은 이상적인 4인가족, 혹은 ‘정상’적인 가족에 관한 이데아를 남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내가 젊을 때는 비교적 가정의 조건이 단순했어요. 그렇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으니 사람들도 가족관을 바꿔야죠. 부모가 이혼해서 갈라지고, 아이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르는 집이 비정상적인게 아니에요. 그렇게 인식을 맞춰가야죠. 황혼 이혼 같은 단어도 나 젊을 때는 없었어요. ‘병들고 아프면 누가 나를 살피나? 가족이 살피지.’같은 생각을 하면 뒤처지는 거예요.”

“이런 걸 가장 많이 느낄 때가 연극 무대예요. 예전에 내가 젊은 시절 동숭동 연극 무대에 서면 여자 관객이 없었어요. 그때 여자들은 아침에 신랑 깨워서 밥 먹이고, 애들 학교 보내고, 비는 시간에는 빨래하고 돌아서면 시부모 점심을 해 드려야 돼. 그 다음엔 애가 하교하고, 좀 지나면 저녁 먹여야 하니까 극장 올 시간이 없었죠. 그때 결혼 안 한 젊은 여자들은 돈이 없으니 아예 못 왔고요. 여자가 좀 있다 싶으면 유한 마담들이나 과부들이 고작이었죠. 지금은 바뀌었어요. 요즘 연극 무대에 서면 관객의 70%이상이 여자 관객이에요. 주부부터 젊은 여성들까지 다양하지. 그렇게 가정도 변하고, 사회도 변해가는 거겠죠. 가족의 개념 자체가 여성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덕구’는 오는 5일 개봉한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 (사진=박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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