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블록의 위협… 감염병 안전지대는 없다

E블록의 위협… 감염병 안전지대는 없다

감염병 공습 국경은 없다②

기사승인 2018-12-24 04:00:00

감염병의 감시와 통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극도로 악화된 환경오염, 탈북민 등의 새로운 형태의 난민 및 이민자의 국내 유입, 더욱 활발해지는 국제 교류는 새로운 감염병 문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응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그리고 감염병의 위협이 비단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 정부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으리란 것은 자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간 보건의료협력은 조금씩 발을 내딛고 있다. 지난 21일 통일부는 북한에 인플루엔자 치료제인 타미플루와 신속진단키트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남북 보건의료 실무회의에서 논의된 인플루엔자 확산 방지를 위한 치료제 지원의 실행인 셈이다. 관련해 지난 겨울 북한은 지난 겨울 세계보건기구(WHO)에 인플루엔자 의심환자 약 30만 명, 확진환자 약 15만 명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감염병은 남북, 북미의 정치 구도를 기다려줄리 만무하다. 지난 2003년 홍콩과 중국을 비롯해 인접한 상당수 국가를 강타한 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 이하 사스). 감염병이 초래한 가공할만한 공포의 흔적을 쫓고 있는 기자에게 남북의 더딘 감염병 협력 속도는 조바심과 답답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타미플루’ 지원 소식에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만난 메이(가명·2003년 당시 12세)의 젖은 눈이 떠올랐다. 사스는 그녀의 전부, 가족을 앗아갔다.    

◇ E블록의 침입자

2003년 3월 말 메이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어머니였다. 해열제를 먹었지만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기침이 점차 심해졌으며 메이는 가슴이 답답해 울음을 터뜨렸다. 

5일후 엄마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는 메이를 발견했다. 남편이 딸을 일으켜 세우는 동안 그녀는 전화기의 999번을 눌렀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외쳤다. “구급차, 구급차를 보내주세요.”   

그러나 그 순간에도 메이의 옆집, 그 옆집, 아래층과 윗층 등 홍콩 구룡의 아모이가든 E블록에는 고열, 기침, 두통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사스라는 신종 감염병이 본격적으로 홍콩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해 4월 15일을 기점으로 아모이가든 E블럭을 비롯해 B, C, D블럭 등으로 감염이 확산됐다. 메이의 엄마와 아빠도 사스에 감염됐다. E블럭에서만 107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 가지 말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대중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공포심이 컸습니다.”

역학 조사에 참여했던 전직 정부 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아모이가든을 사실상 봉쇄한 상태에서 사스 확산 역학조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홍콩 보건부는 사스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불안이 커지자 “감염 사실을 숨기는 이들도 적지 않아 통제에 애를 먹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다른 의료계 인사도 “사스가 빠르게 확산된 탓에 정부의 초기 대응이 여러모로 미비했다”고 귀띔했다. “환자를 돌보던 의료인들이 계속 희생됐지만, 마스크와 방호복 등도 제때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사스에 대한 기본 정보가 현저히 부족해 역학 통제가 지체됐습니다. 대중의 공포는 급속도로 확산됐고, 정부 정책에 대한 협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병의 정보가 부족한 탓에 민간에서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한 주민의 말이다. “까오룽(구룡)의 상가들은 입구에 빙초산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태우면 예방이 된다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이죠. 침사추이를 비롯해 홍콩은 혼돈의 아비규환이 계속됐습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홍콩에서 근무하던 주재원 가족들의 귀국행렬이 줄을 이었다. 당시 부동산 기업에 다니던 김일도씨(가명·50)도 가족을 한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저야 일 때문에 홍콩에 남았지만, 가족들까지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가족을 보내고 나서 저는 자의반 타의반 재택근무를 했습니다. 집에 갇혀 잘 때도 마스크를 쓰고 잘 정도였죠.”

그가 몸담았던 회사는 사스 당시 연쇄 도산한 기업 리스트에 포함됐다. 사스의 공습은 홍콩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때의 분위기를 두고 김씨는 “경악할만한 충격파”라고 표현했다. 

아모이가든에 살던 사람들 329명이 사스에 감염됐고 이중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메이는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어머니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어렵사리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이십대 후반이 된 메이는 15년 전의 그 일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아 했다. 가만히 찻잔을 만지작거던 그녀가 한참 만에 침묵을 깼다.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스는 제게 엄마를 빼앗아갔어요. 사스는 끝난 걸까요? 또 다른 사스가 오면 어떡하죠?” 보이지 않는 위협, 침묵의 침입자. 사스란 감염병은 메이에게 공포 그 이상의 어둠이었다. 홍콩=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이 기사는 「국민건강 증진 공공 캠페인」 (한국인터넷신문협회-한국의학연구소 주최)에 선정된 기획보도입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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