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판결 이후..‘종교적 신념’따른 진료거부 인정해도 될까?

낙태 판결 이후..‘종교적 신념’따른 진료거부 인정해도 될까?

산부인과醫 "낙태, 종교적 신념 따라 거부하게 해달라"...의료인 직업윤리 상충 우려도

기사승인 2019-04-13 04:00:00

의사 개인의 ‘종교적 신념’에 의한 진료거부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가운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인공임신중절(낙태) 진료거부권’ 요구가 주목된다.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종교적 신념’이 새로운 진료거부 사유로 부상한 것이다.

12일 청와대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낙태합법화, 이제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둬야하는지..’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독실한 가톨릭이나 기독교 신자의 경우 종교적 양심으로 인해 산부인과 의사의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의사가 원하지 않으면 낙태 시술을 하지 않도록 진료 거부권을 같이 주시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앞서 11일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낙태죄 헌법소원 판결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진료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과 같은 주장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따른 진료거부권 도입'은 첨예한 법적 쟁점이 될 전망이다.

현행 의료법 제 15조에 따르면, 의료인과 의료기관은 정당한 사유없이 환자 진료를 거부하지 못한다.

진료거부에 대한 정당한 사유로 보건복지부는 ▲의학적인 판단에 따른 퇴원 또는 전원 권유 ▲의사가 신병으로 진료를 행할 수 없는 상황 ▲시설 및 인력 등의 부족 ▲환자가 의료인으로서의 양심과 전문지식에 반하는 치료방법을 의료인에게 요구하는 경우 등으로 예시를 든 바 있다. 여기에 의료인 개인의 '신념’은 포함되지 않는다.

의료법상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에 의료인의 가치관이 포함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의료인이나 법조인 등 고도의 지식과 독점적인 권한을 가진 전문직업인의 경우 직무수행에 있어 철저한 직업윤리 준수가 요구돼왔다. 이들 전문직업인이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우위에 두고 업무를 수행할 경우 주관적이거나 왜곡된 판단으로 타인의 삶과 생명을 위협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진료거부 인정은 낙태 문제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로 확장될 우려도 있다. 의료에 있어 종교적 신념과 관련된 법적판례는 종교적 신념으로 수혈을 거부하다 숨진 '여호와의 증인' 환자의 사례가 있다. 당시 법원은 환자의 뜻에 따라 수혈을 하지 않은 채 수술을 강행한 의사 A씨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반대로 의료인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환자 진료를 거부한 판례는 없다. 그러나 의료인 개인의 신념보다 환자의 생명과 치료받을 권리가 우위에 있으며, 의사 개인 가치관에 따른  진료거부는 위법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1년 박경철 의사의 저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에는 수혈을 죄로 규정하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턴 의사가 병원에 온 응급환자에게 수혈을 시행하지 않아 위험에  빠뜨린 사례가 나온다. 이번 낙태죄 판결로 부상한 '종교적 신념에 따른 진료거부권 인정' 요구에서 어떤 해결책이 나올지 주목되는 이유다.

법조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박호균 변호사는 "의사는 개인일 수 있으나 병원에서 진료를 할 때에는 공인이다. 때문에 개인의 신념에 따라 진료를 해서는 안되며 의학적 지식과 직업윤리를 따라야 한다"며 "판사가 개인의 신념에 따라 판결을 내려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사가 종교적 신념으로 진료를 거부한다는 것은 현행법상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며 "다만 낙태의 경우 환자(산모)의 치료받을 권리뿐만 아니라 태아의 생명권이 같이 문제가 된다. 의료인이 태아의 생명을 지키기위해 낙태를 거부한다는 점은 아주 근거없는 주장은 아닌듯 하다. 입법적으로 예외를 만드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의료문제를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변) 회장인 이인재 변호사는 '의료법 15조의 '정당한 진료거부 사유'에 신념에 의한 낙태 거부를 포함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 회장은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우선하기 때문에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는 의사에게는 정당한 진료거부 사유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며 "결국 사회가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환자단체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면서도 진료거부권 관련 입법에는 반대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 대표는 "환자의 생명이 위협받는 응급 상황에서 의사가 종교적 사유로 낙태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히 안 된다. 그러나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단순 낙태의 경우 태아의 생명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고려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최근 의료인 폭행 문제가 불거지면서 의료계는 '진료거부권 도입'카드를 꺼내든 바 있다. 이에 부합해 지난달 국회는 의료인의 진료거부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법안을 발의한 상황.

환자단체는 진료거부 사유를 법으로 규정할 경우 의사나 의료기관이 환자를 골라 진료하는 방향으로 변질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안 대표는 "특정 상황에서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인정한 새로운 법안을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현행 법에서도 정당한 사유를 두어 진료거부를 인정하므로 현재 있는 법에서 판례를 만들거나 유권해석으로 적정 선을 찾아야 할 문제"라며 "유권해석이 아닌 입법을 통해 의료인의 '진료거부 권리'를 인정할 경우 의사의 독점적인 의료권이 남용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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