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질환자의 치료권 보장을 위해서는 다기관 진료 네트워크와 환자 레지스트리 구축이 필수적이라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희귀질환의 특성상 환자 등록 및 인체자원 수집·관리가 개별 기관에서 수행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23일 제3회 희귀질환 극복의 날을 맞아 서울 서초구 소재 엘타워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는 국내 희귀질환(군)별 임상연구 현황 및 향후 방향 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희귀질환 극복의 날은 희귀질환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고, 예방·치료 및 관리의욕을 고취시키고자 제정됐다.
이날 발표를 진행한 임종필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임상연구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인 크론병’에 대한 대표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를 예로 들며 전국 단위의 임상 네트워크 구축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임 교수에 따르면 크론병은 위장관을 침범하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권에서 발병률과 유병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권에서는 크론병에 대한 인식이 아직 낮아 서구와 비교할 때 적절한 진단과 치료,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지역별로도 크론병 진단과 관리 수준에 편차가 있어 전국 단위의 임상 네트워크를 구축해 ‘한국인 크론병’의 특성을 규명하고 진단, 치료, 관리의 수준을 높일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국내 43명의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참여하는 ‘전국 크론병 네트워크’를 구축해 2009년부터 진단된 크론병 환자들을 전향적으로 등록하고, 크론병 진단 가이드라인 및 치료 가이드라인을 숙지해 표준화된 방법으로 크론병 진단 및 치료, 추적 내용 등을 공유했다.
임 교수는 “이를 통해 한국인 환자 고유의 임상적 특성을 확인하고, 과거 대비 장결핵 오진 사례도 감소되면서 결론적으로 크론병 진단 수준이 개선됐다”며 “또 임상 네트워크를 통해 크론병에 대한 인식을 개선했고, 네트워크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면 한국인 크론병 환자의 장기경과를 규명해 진단 및 치료의 질을 더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종양혈액과 교수도 환자가 적은 희귀질환 특성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환자를 추적·관찰하고, 후기 합병증을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로 소아에서 발생하는 희귀혈액질환 ‘조직구증식증’의 경우 진단이 어렵고 예후가 불량하기 때문에 코호트를 구축해 장기적인 환자의 임상 정보 축적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포괄적인 국내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국내 28개 기관에서 진단받은 603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진단이 늦어지거나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후가 불량한 질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유전적 소인을 갖고 있는 가족성 환자의 생존율이 불량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조직구증식증에서 불량한 예후 인자를 탐색하기 위해 해외에서는 다양한 원인 유전자가 규명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검사 방침이나 결과에 대한 현황 자료가 보고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진단이 어렵고 예후가 불량한 조직구증식증은 코호트를 구축해 장기적인 환자의 임상 정보를 축적하고, 검체를 이용한 연구를 통해 질병 활성도 및 예후를 예측하기 위한 바이오마커 발굴이 필요하다”며 “희귀 질환의 특성상 환자 등록 및 인체자원 수집·관리가 개별 기관에서 수행하기 힘들어 이를 위한 다기관 진료 네트워크 및 환자 레지스트리 구축이 필수적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김 교수는 2013년부터 학술연구용역사업을 통해 전국적인 조직구증식증 네트워크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으며, 기존의 학술용역과제를 통해 구축된 웹기반 임상연구관리시스템(iCReaT)를 통해 장기적으로 환자를 추적·관찰하고, 후기 합병증을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조직구증식증 네트워크는 전국의 의료기관을 망라할 수 있도록 주관연구기관 및 17개의 참여의료기관의 연구원 및 조직구증식증 전문가로 구성됐으며, 현재까지 300건 이상의 임상자료와 2000건 이상의 검체를 확보했다.
‘다발경화증 및 시신경척수염 임상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중개 연구의 기반이 마련된 사례도 있다. 다발경화증 및 시신경척수염은 대표적인 탈수초성 신경면역질환으로 심각한 장애를 방지하기 위해 조기 진단과 적절한 치료와 예방이 반드시 필요한 질환이다.
두 질병 모두 국내에서는 희귀질환으로 대규모 연구를 시행하기 어려웠으며, 이에 2017년부터 시신경척수염, 다발경화증을 비롯한 탈수초성 질환의 체계적인 임상 자료 및 생체 시료 축적을 위한 ‘국내 다발경화증 및 시신경척수염 임상 네트워크’가 구축돼 현재까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병준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신경계 탈수초성 질환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검체 수집, 자료 질 관리 등 역할을 분담했다. 전국적으로 32개 병원 45명의 연구자가 참여했고, 2017년부터 2년간 347건의 혈청 자원을 수집했고 278명을 추적 관찰 중이다”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현재까지 등록된 임상자료는 시신경척수염 및 다발경화증의 임상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코호트 자료로, 수집된 검체는 병인론에 대한 중개연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러한 자료를 분석해 우리나라에 적합한 진단과 치료지침을 개발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희귀질환은 질환이 다양하고, 질환별 환자수가 적은 특징 때문에 질환에 대한 정보의 축적이 어렵다. 또 희귀질환 전문가의 수가 충분하지 않아 진단을 받기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으며, 의료기관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지방거주 희귀질환자의 경우 진단 이후에도 치료․관리에 어려움이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정부는 희귀질환자들의 의료접근성을 강화하고, 표준화된 희귀질환 관리방안 및 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희귀질환 권역별 거점센터를 올해 초 확대한 바 있다. 거점센터를 기존 4개소에서 10개소로 확대하고 권역별 거점센터의 역할과 기능을 지원하기 위한 중앙지원센터를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권역별 거점센터는 지역 전문진료실 운영, 전문의료인력 교육, 진료협력체계를 구축해 희귀질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포괄적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희귀질환 중앙지원센터는 전국 10개 권역별 거점센터가 희귀질환 진료 및 연구조사, 교육훈련, 환자등록 등의 지원 사업을 적극 수행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지원한다. 지방에 거주하는 희귀질환자들이 지역 내에서 지속적인 질환관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유수인 기자 suin9271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