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왕위 계승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34) 왕세자가 26~27일 한국을 방문했다. 언론의 관심은 ‘10조원 투자 약속’에 집중됐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는 유엔이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 배후에 있다고 지목한 논쟁적 인물이다.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에 대통령은 물론 5대 그룹 총수 등 정재계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26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이례적으로 공항에서 빈 살만 왕세자를 직접 맞이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같은날 청와대에서 빈 살만 왕세자와 공식 오찬을 연 데 이어 별도의 친교 만찬을 가졌다. 회담 이후에는 문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가 참석한 가운데 수소경제와 자동차산업 분야 협력을 비롯해 10건의 양해각서(MOU)가 체결됐다. 계약 규모는 약 83억달러(약 9조6000억원)에 이른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국정운영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실권자다. 그의 공식 직책은 제1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지만 연로한 아버지 살만 국왕을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지난 2017년 6월 친위 부대를 동원해 정적인 사촌 왕자들과 전현직 장관들을 부패 혐의로 대거 체포하는 ‘숙청 작업’을 통해 왕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 석유수출 위주의 사우디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비전 2030’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사우디 현대화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권탄압의 그늘이 있다. 유엔은 지난 19일 사우디 왕실 문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써오다 지난해 10월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당한 카슈끄지 살해 사건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했다. 아녜스 칼라마르 유엔 특별 보고관은 보고서에 “빈 살만 왕세자를 비롯해 사우디 고위 인사들이 카슈끄지 살해에 개입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다”고 명시했다.
또 빈 살만 왕세자는 반체제 인사를 탄압한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지난 4월 영국 가디언지는 사우디 교도소 수감자들의 몸에 각종 가혹행위를 당한 흔적이 있다는 정부 보고서를 입수해 공개했다. 교도소에는 여성 인권 운동가 수십명이 반체제 세력으로 몰려 수감 중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인권 운동가들은 전기 고문, 구타 등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두고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는 등 여성 친화적 정책을 펼치는 듯 보였던 빈 살만 왕세자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청와대 앞에서 재한 이집트인들이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다. 이집트 군사 정권 탄압을 피해 망명한 언론인 출신 난민들로 이뤄진 ‘이집트혁명가그룹’은 아랍에미리트(UAE) 빈 자이드 왕세제가 방한하고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청와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빈 살만 왕세자와 빈 자이드 왕세제는 아랍의 봄 혁명을 짓밟은 핵심 세력이자 예멘 내전에 개입해 예멘 어린이들을 죽인 살인자”라면서 “우리는 인권을 존중하는 문명 국가인 한국 정부가 이들을 초대한 것에 항의한다. 촛불 혁명이 벌어진 나라에서 이런 자들을 초대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촛불 혁명을 이끈 한국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한다”면서 “한국 정부가 수치스러운 일을 멈추게 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을 지지해주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