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가 뭐기에

1위가 뭐기에

기사승인 2019-08-16 08:00:00

“진짜 1위를 가린다.” 엠넷 새 예능프로그램 ‘퀸덤’ 포스터에 적힌 문구다. 세상에 ‘가짜 1위’도 있었나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제작진의 프로그램 소개가 또 한 번 말문을 막는다. “서로 눈치 보며 맞대결을 피하는 김빠진 컴백은 더 이상 없다”라니. 경쟁 형식의 음악 예능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소개하는 방식은 요란하고 구식이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또 순위 전쟁이다. ‘퀸덤’은 여성 그룹 6팀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음원을 내 1위를 가르는 방식의 음악 예능으로, 그룹 마마무, AOA, 러블리즈, 오마이걸, (여자)아이들, 가수 박봄이 출연한다. 그런데 제작진의 비장한 각오와는 달리, 이들 팬덤은 ‘퀸덤’ 출연을 반기지 않는 모습이다. 반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출연을 취소하라는 목소리도 크다. 과도한 경쟁이 가수와 팬덤 모두에게 소모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프로그램 출연진이 처음 공개된 지난달 말, SNS에는 ‘#엠넷_퀸덤_취소해’ ‘#엠넷_퀸덤_폐지해’ 등의 해시태그가 퍼져나갔다.

경쟁을 떠나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퀸덤’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락을 위해 경쟁이라는 장치를 넣고도 탄탄한 콘텐츠로 호평받은 음악 예능이 없진 않으니까. 하지만 ‘퀸덤’의 문제는 기형적인 음악 시장의 구조를 강화한다는 데 있다. 팬덤 간 경쟁을 부추겨 탄생시킨 1위를 “진짜 1위”라고 볼 수 있을까. 더욱이 CJ ENM은 방송사인 엠넷과 음원 플랫폼 사업자 엠넷닷컴을 모두 보유한 문화계 ‘공룡 기업’이다. 음원 순위 경쟁이 팬덤만의 전쟁으로 변한 지 이미 오래라 해도, 방송사이자 음원 플랫폼 사업자가 나서서 경쟁을 붙이는 건 다른 문제다. 음원 차트가 당대 유행하는 곡을 보여주는 정보 전달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플랫폼 스스로가 인정한 꼴이 돼서다. 음원 순위가 팬덤 간 경쟁의 반영이라면, 실시간 차트의 존재 당위성은 약해진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놈의 1위가 뭐기에. ‘1위 가수’라는 타이틀은 소수의 승리자만 살아남는 ‘헝거 게임’ 같은 음악 시장 안에서 플레이어의 위치를 단숨에 격상시킨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결국 아무 해답도 얻지 못한 ‘음원 사재기’는, 이런 기형적인 구조가 만든 반칙이다. 불공정한 경쟁을 가려내고 규제해야 마땅한 플랫폼 사업자들은 기술적인 한계와 정보 전달 기능 등을 근거로 여전히 실시간 차트를 운영 중이다. 심지어 ‘급상승 차트’, ‘5분 차트’처럼 실시간 차트를 더욱 세분화해 발표한다. 과연 이 차트들의 순기능은 그것들의 역기능을 상쇄할 정도로 큰가.

“역주행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한 거야. 지금은 (발매) 첫날 1위를 하느냐 못 하느냐의 싸움이잖아.” 가수 유희열이 MBC ‘놀면 뭐하니’에서 한 말은 실시간 차트 경쟁이 만든 기형적 구조를 향한 일침이다. 가수 윤종신이 월간 음악 발매 프로젝트 ‘월간 윤종신’을 시작한 이유도 이런 산업 구조 안에서의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월간 윤종신’이라는 아카이브 안에서 ‘본능적으로’, ‘오르막길’처럼 뒤늦게 빛을 보는 노래들이 생기자, 비슷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가수들이 늘었다. 하지만 대개는 오래 가지 못했다. 프로젝트를 장기간 밀어붙일 동력이 부족해서다. 

가수들이 신곡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이번 활동의 구체적인 목표’, 쉬운 말로 ‘몇 위 하고 싶니?’다. 데뷔한 지 5~6년이 되도록 ‘1위 곡’을 배출해내지 못한 그룹은 ‘못 뜬 그룹’으로 낙인찍힌다. 방송사, 기획사, 플랫폼 사업자, 언론 등 주요 관계자들이 한목소리로 ‘1위 타령’을 한다. 그 안에서 ‘제2의 월간 윤종신’ 같은 흐름이 나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진짜 1위’를 가리는 일은, 순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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