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시골 마을, 옹산. 씨족 사회를 방불케 하는 이 작은 마을에선 누구네 수저가 몇 개인지도 서로 훤하다. 무심한 말투 속에 숨긴 끈적한 정(情)은 때론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누구도 악마로 그리지 않으려는 임상춘 작가의 푸근한 시선 덕분이다. 하지만 이 넉넉한 인심과 유쾌한 묘사를 들춰보면, 진상스런 면면들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꼽았다. 옹산 주민들에게서 배우는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한 생활 강령’.
1. “고종사촌 누나의 부군과 ‘거진’ 사돈지간”은 그냥 남이에요.
규태는 옹산의 유지이자 실세(라고 스스로 주장한)다. 방앗간집 좌측부터 갯벌 직전까지의 땅과 대여섯개의 건물을 가진 ‘알부자’고, 옹산 각계의 인사들과도 혈연으로 엮였다. 용식이 옹산파출소로 전입해 온 첫날, 변 소장(전배수)은 그를 “고종사촌 누나의 부군과 옹산 경찰서장이 ‘거진’ 사돈지간”이라고 소개했다. 용식의 물음처럼 ‘거진 사돈’이 무슨 의미인지는 불분명한데, 규태는 자신의 인맥이 위력의 근거가 된다고 굳게 믿는다. 그에겐 돈도 있다. 까멜리아의 유일한 양주 손님이자, 까멜리아가 입점한 건물의 주인이다. 그는 이런 지위가 땅콩 한 접시나 동백의 손목 잡는 값과 맞먹는다고 생각한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동백에에게 윽박을 지르고 주정을 부린다. 하지만 기억하자. ‘고종사촌 누나의 부군과 거진 사돈’은 그냥 ‘남’이고 건물주는 ‘고향 오빠’가 아니다.
2. “쏘리!!!” 대신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해요.
규태는 사과에 인색하다. 열등감과 자존심의, 환장할 컬래버레이션 때문이다. 동백이 쓴 ‘치부책’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규태는 다급해진다. 사과냐, (아무도 약속해준 적 없는)공천 탈락이냐. 규태는 사과를 택한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진 않다. 그는 외친다. “암 쏘리!!! 아, 쏘리쏘리쏘리쏘리!” 그러자 반말하지 말라는 질책이 날아온다.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던 그의 선택은 이렇다. “아임 쏘립니다요. 쏘리라굽쇼” 엎드려 절받기도 이보단 낫겠다. 아내 자영(염혜란)에겐 더 심하다. ‘미안’은커녕 ‘쏘리’의 쌍시옷도 못 꺼낸다. 이혼을 요구하는 자영에게는 강짜를 부리면서, 엄마 홍은실(전국향) 앞에서만 “우리 자영이” 타령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처사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게 언제나 면죄부가 돼주진 않는다. 알고도 저지른 잘못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기억하자. 미안할 땐 ‘쏘리’ 대신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면 된다.
3. 네 열등감, 너 혼자 삭여요.
규태는 ‘존경’에 약하다. “내가 오빠 존경하잖아”라는 최향미(손담비)의 말에 깜빡 넘어가 양평에 웨이크보드를 타러 갔다가 호되게 당한다. 그가 동백에게 추근대는 것도 동백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고, 자꾸 바깥으로만 도는 것도 자신보다 잘난 아내에게 기가 죽어서다. 한 마디로 규태는 열등감 덩어리다. 그는 남보다 우위에 서는 것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그러니 동백이든 향미든 자영이든 자꾸만 후려치려고만 한다. 하지만 궁금하다. 무식이 콤플렉스면 배우면 될 일이고, 영어를 모르면 한국어로 쓰면 될 일 아닌가. “당신 앞에선 남자 하고 싶어서, 더 못나졌던 것 같다”는 규태의 반성에 그나마 안도하면서, 기억하자. 열등감을 드러낼수록 자신만 낮아진다.
4. ‘이런 말 할 자격’은 당사자에게 있어요.
용식과 강종렬(김지석)은 끊임없이 싸운다. 이들은 동백의 일에 참견할 ‘자격’을 두고 다투는데, 둘의 대화에서 “당신이 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같은 표현이 자주 발견되는 건 이 때문이다. 용식은 동백의 ‘썸남’ 혹은 ‘남친’이라는 자격을 앞세워 참견의 당위성을 얻고자 하고, 종렬은 자신이 필구(김강훈)의 친부라는 사실을 내세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용식과 종렬 둘 다 동백의 결정에 참견할 권한은 없다. 동백은, 필요하다면 종렬을 만날 수 있다. 종렬이 계속해서 필구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으니, 상의를 하든 거부를 하든 담판을 지어야 할 것 아닌가. 동백은 또한 원한다면 용식과 교제할 수도 있다. 자신이 필구의 친부라는 이유로, 종렬이 동백의 애정 관계에까지 간섭할 수는 없다. 동백의 일은 동백이 통제한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어떤 일을 결정할 자격은 오로지 당사자에게만 있다.
5. 안아주세요, 따뜻하게.
동백은 누구든 품는다. 3000만원을 들고 튄 향미를 품고,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던 엄마 정숙(이정은)을 품는다. 자신을 배척하던 옹산 주민들도 그들이 건넨 김장김치 한 통에 품어버린다. 동백은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연쇄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박흥식(이규성)이 수군거림의 대상이 됐을 때조차(물론 흥식이 진짜 살인자이긴 했지만), 동백은 흥식을 품어줬다. 그는 자신이 당했던 낙인과 배제의 폭력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다정은 동백의 힘이다. 그가 보여준 따뜻함은 딴 길로 새거나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모습의 선의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동백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의 “곁에서 항상 꿈틀댔을 바닷바람, 모래알, 그리고 눈물 나게 예쁜 하늘”도.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