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만져! 꺼져. 너나 다 먹어 XX야”
젊은 여성이 아버지뻘로 보이는 백화점 보안 요원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얼굴에 콜라를 뿌리고 그릇을 던진 뒤 옷을 잡고 밀친다. 여성은 급기야 자신을 제지하려 다가온 다른 보안 요원의 뺨을 친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백화점의 한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시민이 촬영한 영상이 SNS상에 급속도로 퍼졌다. 폭행을 당한 백화점 하청업체 소속 보안요원 A씨는 처벌 의사는 없다는 기존 입장을 바꿔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매년 백화점 갑질·난동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A씨처럼 ‘갑질’ 고객에게 법적 대응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감정노동자들은 여전히 참고 넘어가는 방법을 택한다. 문제를 덮으려고만 하는 회사와 백화점측 갑질에 두 번 상처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감정노동자들이 그저 갑질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도 이들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백화점 노동자 대부분은 하청업체 또는 협력업체(입점 브랜드) 소속이다. 백화점과 회사간 갑을 관계, 본사와 직원 간 갑을 관계 사이에서 노동자는 이중으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백화점 감정노동자들은 고객의 욕설, 갑질에 ‘무조건 사과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지난 13일 경기도 고양시 한 백화점에서 만난 의류매장 직원 김모(45·여)씨는 “지난해 한 손님에게 ‘(해당 의류는) 사이즈가 없다’고 말했다가 ‘내가 뚱뚱하다고 깔보냐’며 전화로 심한 욕설을 들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본사와 백화점측도 직원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사과하라고 했다”면서 “잘못하다가는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덮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청업체 소속인 백화점 청소노동자 주모(58·여)씨는 “동료 직원 한 명이 화장실 청소 중 혼잣말로 ‘왜 물을 안 내리지’라고 말했다가 시말서를 썼다”면서 “고객과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고객 우선이다. 우리에게는 입장 따위는 없다”고 했다.
고객의 갑질에 멍든 노동자를 상대로 백화점이 또다른 갑질을 행사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한인임 시민단체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정책연구팀장은 “고객이 화장품을 반쯤 쓰고 와서 교환을 요구해 이를 거절하자 폭력을 행사했다”면서 “이후 법적으로 아무런 권한이 없는 백화점 매니저가 판매자에게 ‘고객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한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회사와 백화점의 외면은 노동자들의 우울증, 공황장애로 이어진다. 지난 2018년 고려대 김승섭 교수팀이 백화점, 면세점 화장품 판매 노동자 2806명을 조사한 결과 전체 6.1%가 우울증, 2.4%는 공황장애로 진단, 치료를 받았다. 이는 비슷한 연령대 여성의 3.5배, 12배다. 김 교수는 국회에서 실태조사를 발표하며 “매장 측도, 이들을 파견한 회사도 갑질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 것이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감정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있긴 하지만 실효성이 부족하다. 지난 2018년 10월 ‘감정노동자보호법’이 시행됐다. 감정노동자가 ‘가해 고객으로부터 피할 권리’를 명문화했다. 또 감정노동자가 갑질을 당하면 사업주가 그 업무를 중단시키고 보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직접 고용된 감정노동자만이 적용 대상자다. 백화점이나 마트 등에서 일하는 협력업체, 하청업체 소속의 노동자들은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셈이다.
이지연 대전시노동권익센터 감정노동지원팀장은 “감정노동자 90%가 용역, 하청인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하청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대상에 감정노동자를 포함하는 등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실효성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