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그 해 봄, 박물관에 가다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그 해 봄, 박물관에 가다

기사승인 2020-04-30 12:01:28

‘살다보면 인생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법이지.’(신경숙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중에서). 그 해 봄, 나는 박물관 돌계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 구절까지 읽도록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과 그곳에 갔을 때만해도 혼자 계단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표소에 늘어선 줄을 보고 한숨을 쉬는데 아이들은 무료입장이라 그냥 들어가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아이들만 들여보낸 뒤, 마침 갖고 있던 책을 읽었다.

엄마랑 같이 들어갔다면 총알택시 지나치듯, 시간과 역사를 넘었을 아이들이 저희끼리 들어가니 나올 줄을 몰랐다. 나도 언젠가 보았을 금관과 도기들만 있던 그곳에 새로운 무엇이 생긴 걸까. 과거의 시간 속에서 길이라도 잃은 걸까. 나도 책읽기를 멈추고 경복궁만 바라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첫 경복궁은 유치원소풍 때였다. 그 시절, 할아버지의 상중이었던 엄마는 내 유치원 생일잔치에도 하얀 상복을 입어, 곱게 차려입은 다른 엄마들에 비해 나를 섭섭하게 하더니 기어이 소풍날도 그것을 벗지 않으셨다. 내 남자짝꿍의 엄마는 체크무늬투피스를 입었고 다른 엄마들도 맘보바지를 입었는데 나는 우리엄마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엄마가 김밥과 사이다에 삶은 계란을 펼쳤을 때. 짝꿍의 엄마는 삼각형으로 자른 딸기잼 샌드위치를 꺼냈다. 간단한 샌드위치 맛이란 그저 그럴 뿐이지만 어쨌든 그 세련됨에 무언가 기분이 나빠져, 나는 돌아앉아 계란만 까먹었다. 평소에도 좋아하지 않던 퍽퍽한 노른자가 유난히 먹기 싫어 풀밭에 버리고 흰자만 대여섯 개째 먹고 있을 때였다. 내가 목이 멜까봐 걱정하던 엄마가 내 발밑을 보셨다. 아직도 그때 엄마의 말이 선연하다. “우리 정화 발밑에 노란 병아리가 숨었네.” 

맘보바지와 체크무늬투피스에 뾰족구두로 예쁘게 차려입은 엄마들보다, 기분상한 나를 위해 한복 속치마 속 고쟁이까지 펄럭였을 엄마의 흰 고무신이 나았던지 엄마와 손잡고 달린 뜀박질에서 우리는 이등을 하였다. 나는 상으로 인형을 받고 좋아진 기분으로 씩씩하게 잔디밭을 누벼 보물딱지를 두 장이나 찾았다. 

상도 못 받고 보물 딱지도 못 찾은 짝꿍의 엄마가 ‘한 장만 주면 안 되겠냐’고 묻기에, 나는 서로 좋아하던 짝꿍에게 선선히 한 장을 주어버렸다. 끝까지 남은 우리들의 보물딱지가 나는 ‘꽝’이었고 내가 준 짝꿍의 것은 일등을 하여 은수저를 탔다. 뒤도 안 돌아보고 수저만 챙긴 짝꿍의 엄마가 아들을 질질 끌고 서둘러 떠난 뒤, 엄마가 웃으며 혀를 차시던 것도 기억난다. “아이고, 인사도 없이 가시네. 누가 다시 달랄까봐.” 

박물관 앞 계단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나도 흘러간 시간을 되짚었다. 그 때까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내 삶 속에 남은 나의 유물은, 딸자식 몸뚱이에 흉이 남을까, 세심한 어머니가 어깨대신 발바닥에 놓게 하신 우두예방주사 자국과 선물로 받은 귀걸이를 하느라, 무서움을 참고 뚫은 두 개의 귓구멍뿐이었다. 중학교이후 크지 않은 몸집과 얼굴에 생긴 몇 개의 주름, 그리고 순간순간 나를 빛 속으로 데려다주던 어린 날의 기억과 당시엔 운명인줄 알았던 결혼과 아이들뿐이었다. 

내 초기박물관엔 경복궁의 추억처럼 빛바랜, 그러나 행복한 나만의 꿈과 재능도 몇 개쯤 남겨있을 테지만 중기이후에 가서는 변변한 내 자신의 유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살아가며 오래오래 제 가치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의 삶은 알 바 없이 혁명이나 죽음처럼 순간에 이름을 각인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니 ‘살다보면 필요한 인생의 재구성시기’는 나에게도 절실했다.

제 엄마가 돌계단에서 ‘유물’이 되도록, 늦게야 나온 아이들은 초기 중기는 금방 지나쳐갔는데 조선시대 후기의 유물이 워낙 많아 늦었다고 했다. 엄마도 그럴 거다. 엄마의 박물관도 중기까진 썰렁했지만 후기 말기의 시간에는 혁혁한 존재의 재구성을 가질 거라며 그해 봄, 나는 박물관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2020년 봄, 그때를 생각한다. 이제 이 봄 이후, 나뿐만이 아닌 우리 지구의 모두는 인생의 재구성, 존재의 재구성을 생각해봐야 할 때를 맞았다. 사람과 자연, 삶의 방식과 가치, 우리가 누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와 이웃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순간, 살다보니 정말로 그것이 필요한 시기가 폭풍처럼 왔다.

이정화(주부/작가)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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