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언어는 봉쇄된다, 그마저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마스크는 면책특권을 부여받는다. 억제된 사람의 말은 마스크 너머 뿌연 입김으로 얼룩지고 이 모진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지.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공간도, 기회도 원천봉쇄 되어가고 있다. 안개에 뒤덮인 눈먼 자들의 도시 같은 사람의 마을은 그렇게 어김없이 새해를 받아들였다. 설렘은 두려움으로 치환되었다.
생태계 먹이 사슬의 정점에 위치한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온갖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 고통받고 있다. 질풍노도의 이 자본주의를 당장 멈출 수 없다면, 늦추기라고 해야 되는데 저마다 줄달음쳐 달려가는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자고 말하려 해도 생존의 절박함을 넘어설 수는 없다. 전면 봉쇄를 뜻하는 3단계를 쉬이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이리라.
이 겨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매일 신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끼니를 채우듯 통보받고, 거리 두기 단계가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를 주말이면 어김없이 통보받는다. 모두가 코로나19의 종식을 기다리며 예수의 부활을 알린 ‘나사렛포고령’을 기다렸지만 전쟁을 선포하는 선언문 같기만 하다. 자주 가던 가게는 몇 시까지 열 수 있는지, 매장 취식은 몇 명이서 가능한지, 아니면 배달만 되는지, 아이들의 학원은 몇 명까지 갈 수 있는지 늘 다니던 헬스클럽은, 겨울 소일거리였던 스키장은, 동네 목욕탕은, 우리의 모든 일상은 저마다의 품행 규격을 정해 서슬 퍼렇게 통보받는다. 위반 시 벌도 고약해 고조선의 8조 금법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느린 걸음으로는 줄행랑치는 코로나19를 따라잡지 못할 터이니.
지난겨울 초입에 코로나19의 그 어둡고 음습한 기운을 처음 보았다. 다시 그 겨울이 왔지만 상황은 더욱 점입가경이다. 시대의 가난한 이들이 버텨낼 수 없는 겨울은 코로나19가 더 가혹하다. 조금이라도 이 혹독한 상황을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람들의 한탄도 임계점에 와있다. 그러나 버틸 수 없는 삶들은 도처에 산재되어 있다. 찢기고 무너져 너덜너덜하다. 그래서 두렵다. 이 시린 겨울이.
진료실 너머 양재 시민의 숲으로 향해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닫힌 창문을 살포시 여니 겨울 청명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철새들의 울음소리는 봉새를 뚫은 자유의 울음으로 전해진다. 어디서 왔는지 가늠하기 힘든 철새들의 울음소리는 코로나19로부터의 억압을 뿌리치는 자유의 안도감일 수도 있겠다. 이동의 V자 대형을 유지하라고 서로 간에 울음소리를 내니 언어를 봉쇄당한 인간보다 그들의 처지가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단절과 봉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철새의 날개는 마냥 동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 날개가 될 수는 없다.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잊은 채 높이 날아오른 이카로스는, 결국 태양열에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에게해에 떨어져 죽고 말지 않았던가.
너무도 답답해서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스스로 봉쇄의 고통을 감내하자. 더 이상 누구누구의 탓으로 이 비정한 감염병의 확산을 탓하지 말자. 새해 샘솟는 해돋이가 보고 싶고 그리운 이들을 찾고 싶어 날아오르려는 그 날개는 이카로스의 밀랍 날개인 것을 결코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