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강한결 기자 = 2021년 1분기 게임업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는 '확률형 아이템'이다. 국내 개발사의 주요 수익모델(BM)인 확률형 아이템은 일종의 ‘뽑기’와 유사하다. 게임사가 정한 확률표에 따라 일반 아이템 혹은 희귀 아이템이 등장한다. 적게는 수만원, 많게는 수백만원을 들여야 원하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구조다. 최악의 경우엔 능력 이상의 재화를 쏟아부어도 원하는 아이템을 얻지 못한다.
'고급 아이템'을 뽑을 확률이 매우 낮다는 지적은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최근 넥슨 '메이플스토리' 등에서 인게임 확률이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확률형 아이템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태다. 이제는 확률형 게임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공개를 의무화 하는 내용을 담은 게임산업법 전부개정법률안(게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이후, 확률형 아이템을 아예 금지하는 방식의 강도 높은 후속 법안들이 발의되는 중이다.
◆ "확률형 아이템 대체할 BM 없다"는 게임업계
게임업계는 게이머의 비판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확률형 아이템 자체를 없애려는 규제 움직임에는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모바일 위주의 국내 게임시장에서 확률형 아이템을 대체할 실질적인 BM모델이 없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내 게임사의 주요 BM은 월 정액제 혹은 패키지 판매(유료화 모델)였다. 당시만해도 지금처럼 온라인 라이브 서비스가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유료화 모델로도 충분한 수익창출이 가능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온라인 라이브 서비스가 자연스럽게 자리잡히면서, 서버운용을 위해 상당한 자금이 투입됐다. 온라인 서버를 유지하려면 패키지 판매 이상의 수익이 필요해진 셈이다. 이 과정에서 게임사들은 하나둘씩 부분 유료화 모델(모든 상품에 과금하는 것이 아니라 무료로 이용하는 부분과 유료로 이용하는 부분으로 나누어 과금하는 방식)을 도입했고, 모바일 게임이 주류가 된 2010년부터는 주요 BM으로 자리매김했다. 부분 유료화의 대표적 형태인 확률형 아이템이 메인스트림으로 떠오른 것도 이 무렵이다.
대형 게임사에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유저들의 비판에 죄송할 따름"이라면서도 "확률형 아이템 자체가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확률형 아이템에 문제가 있다고 없애버리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결과'라며 "확률의 공정성을 높이는 등 현실적 방식의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확률형 아이템을 없애고 나면 사실상의 대안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라며 "심지어 패키지로 판매가 되는 게임에도 뽑기 요소가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어 "게임사 역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유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테니, 시간을 조금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게임을 가볍게 즐기는 라이트 유저도 늘고 있다"며 "이들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헤비 유저를 따라가기에는 사실상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확률형 아이템은 유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고, 최소의 금액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라며 "지나친 과금 유도 등 사행성 관련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랜덤성에서 오는 재미 요소 역시 게임의 일부"라고 덧붙였다.
30대 직장인 게이머는 "게임업계가 확률형 아이템으로 지나친 사행성을 조장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정치권이 게임산업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는 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확률공개를 추진한다는 법안이 나오고 있는데, 낮은 확률이라도 뽑기를 할 사람들은 다 하게 돼있다"며 "최근 '착한 과금'을 지향하는 게임에 대해서는 유저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게이머가 확률형 아이템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적어도 유저가 지불한 금액만큼의 만족도를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지는 개선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 '천장 도입'·'확률보장제도'까지… 실망한 게이머 위해 필요한 방안은?
전문가들은 확률형 아이템을 없애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해결책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개발자는 "여러 과격한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게임사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면서도 "다만 정치권이 이같은 극단주의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최근 '가챠'를 도박으로 규정하고 '다 없애야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우선 이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금까지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없었다는 것이 유저들의 분노를 유발한 것이다. 게이머와 업계 둘다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의견 중 하나는 '천장 시스템(특정 아이템 획득 확률 상한선)'의 도입이다. 천장 시스템이란 간단히 말해 확률형 아이템 가격에 일종의 '천장(한계)'을 만들어 무한 과금을 방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대부분의 확률형 아이템은 독립 시행 방식으로 적용된다. 이전 시행 결과가 다음 시행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원하는 아이템을 뽑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백 번을 시도해도 아이템을 얻을 수 없다. 한 관계자는 "가챠 시스템에 소위 말하는 '천장'을 도입하면 무리한 과금을 막을 수 있는 등 어느 정도 소비자 보호조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천장의 높이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관건이다. 관계자는 "예를 들어 과금 천장이 지나치게 높다면, 오히려 천장 도달을 위해 오히려 과금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유저와 게임사,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그동안 해묵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소한도 확률보장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최소한도 확률보장제도는 가챠에서 등장하는 아이템의 확률을 유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고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 관계자는 "모 게임의 경우 엔드 콘텐츠 급의 최종 아이템을 뽑을 확률이 0.000008%"이라며 "로또 6개 숫자를 모두 맞출 확률(0.000012277)보다 적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게임사마다 고려해서 수치를 지정했다 해도 최소한 유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한다"고 지적했다.
"현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1인 개발자로 활동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현금으로 구매한 아이템이 캐릭터의 능력치에 영향을 미친다면, 결국 유저간의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예를 들어 현금으로 구매한 아이템은 캐릭터의 외형을 꾸밀 수 있게 설정하면 된다"고 말했다.
해외 게임의 경우 이와 같은 BM구조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히어로즈 오브 스톰'과 같은 게임에서 유저들은 현금을 통해 '스킨'을 구매할 수 있다. 스킨은 게임 캐릭터의 외형을 변화시키는 아이템을 의미한다. 유저는 자신의 만족하는 외형의 아이템을 위해 현금을 사용하지만, 스킨은 게임 캐릭터의 능력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단순히 미적인 만족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다만 모바일 게임 시장의 주류 장르인 RPG에는 스킨 시스템을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게임 장르에 적합한 BM을 적용해 유저와 게임사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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