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정보 부족에 사실상 접근성 제로
[쿠키뉴스] 유수인 기자 =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관련 입법 공백이 7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인공임신중절 수술 종류, 시술 의료기관, 수술 후 합병증, 계획 임신 등에 대한 정보 및 인프라 부족으로 안전한 임신중절 또는 임신유지 결정이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정부가 반복적인 낙태 시술을 예방하고 관련 의학정보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의사 교육‧상담료 수가를 신설했지만 정작 의료현장에서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기결정권 존중…낙태 수술 관련 공식 정보는 부재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가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낙태죄 관련 법안의 입법 시한은 지난해 연말까지였는데 형법과 모자보건법이 개정되지 않으면서 낙태죄 처벌조항도 사실상 폐지됐다.
하지만 임신중단 진료체계에 대한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입법공백 상태가 지속되다보니 안전한 임신 중지 또는 임신 유지 결정이 어려워지고, 여성들의 ‘자기결정권’ 침해도 계속되고 있다.
박진경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사무처장은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로서 숙고를 거친 임신중지에 대한 결정을 ‘권리’로서 존중받을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남성 중심의 피임방법 결정 등 불평등한 성역할 규범에 의해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낙태죄 자동소멸 이후 인공임신중절 관련 의료, 상담, 정보제공 등에 대한 입법 공백으로 정책 대상자와 의료 현장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있고, 인공임신중절 합법화 및 수술 가능 의료기관에 대한 공식적인 정보‧상담체계가 부재해 안전하지 못한 불법 약물 사용, 수술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국가는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 및 건강보장 차원에서 공적 의료서비스체계 등을 보장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며 “임신‧출산은 여성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자율적이고 안전한 임신중지는 생애 전반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 보장을 위해 중요하다.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할 때 임신‧출산 전반의 건강 보장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앞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지난 2019년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만15세 이상~44세 이하 여성 1만명 중 인공임신중절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71.9%는 낙태 당시 ‘수술 가능한 의료기관’에 대한 정보가 가장 필요했다고 답했다. 이어 인공임신중절에 드는 비용 57.9%, 인공임신중절로 인한 부작용 및 후유증 40.2%, 하는 방법 13.6%, 전문적인 상담을 제공하는 기관/단체 11.1%, 인공임신중절 관련 법률정보 5.2% 순이었다.
◇ 인공임신중절 ‘교육‧상담’부터 지원, 의료계는 ‘황당’
보건복지부는 우선적으로 인공임신중절 관련 의학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하고 반복적인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 인공임신중절 교육‧상담료를 최근 신설했다. 이에 인공임신중절 관련 교육‧상담을 요청한 임신 여성은 의사로부터 진료실 등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에서 약 20분간 ▲인공임신중절 수술행위 전반 ▲수술 전․후 주의사항, 수술 후 자가관리 방법 ▲수술에 따른 신체․정신적 합병증 ▲피임, 계획임신 방법 등에 대해 심층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의료진이 개인적 신념 등의 이유로 상담을 거부하더라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고, 상담 가능한 의료기관 정보도 없어 임신 여성들은 이전처럼 알음알음으로 병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의료계도 갑작스러운 고시 개정에 당혹스럽다는 입장이다. 김동석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장은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능 주수는 몇으로 할지 관련 법령부터 만든 다음에 교육이나 상담을 논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뀐 것 아닌가”라면서 “복지부와 입법부는 직무유기하면서 계속 지켜만 보고 있다. 국민 건강권을 보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중요한 문제는 손을 놓고 있고 의사들이 원하지도 않던 교육상담료를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김 회장은 “의사회는 절체 절명한 사건이 아니라면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학계 등과 함께 임신중절 교육·상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상담료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의료계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며 “그리고 의사들이 매일 고시를 확인하는 것도 아닌데 적응기간도 없다. 환자가 상담 받겠다고 찾아와도 의사는 모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상담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상담료를 환영할 것 같진 않다. 의사들은 상담수가가 있든 없든 기존에도 상담을 해왔고, 상담료 없이 수술을 했었는데 느닷없이 비용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상담료를 청구하면 기록이 남을 텐데 그걸 동의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필량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은 “태아의 생명이 중요하지만 많은 단체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중요시하고 있고, 정부와 국회도 소극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회에서는 의사의 양심에 따라 주수를 결정해서 시술을 하라고 할 수밖에 없다”면서 “다만, 태아의 생명, 본인의 건강 등을 고려하지 못하고 낙태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지침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 이사장은 “하지만 지금은 상담료를 받지 않고 관행대로 수술을 하더라도, 상담 없이 수술만 해주어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반대로 환자가 기록 남기는 것을 싫어해 상담수가를 받지 않고 끝낼 수도 있다”며 “낙태죄는 폐지됐는데 그를 대신할 법이 없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상담수가를 신설한 의도도 우려스럽다. 법이 없는 상태에서 의사들이 신경을 써서 무분별한 임신중절을 막아줬으면 한다는 뜻이라면 좋겠으나, 전체 인공임신중절 수술에 대한 급여화를 위한 밑작업이라면 의사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며 “질병도 아닌 자기결정권으로 인한 시술에 건강보험 재원을 활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부연했다.
◇ 정부 “낙태 지식 없다면 진료거부 아니다”
정부는 산과가 있는 의료기관이라면 인공임신중절 관련 상담‧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의료진이 관련 의학적 지식이 없을 경우 진료거부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손문금 복지부 출산정책과장은 “산과 학회와 함께 인공임신중절 관련 의학적 상담 프로토콜을 개발하고 산과가 있는 의료기관에 배포했다. 이는 임신한 여성들이 전문가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제공 받으면서 낙태 여부를 숙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보사연의 실태조사 결과, 반복적으로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횟수가 평균 1.43회였고, 의료기관으로부터 얻는 의학적 정보가 부족하다는 응답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상담은 시술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시술을 하지 않더라도) 산과가 있는 병원에서 상담할 수 있도록 했다. 낙태를 고민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정보를 제공해달라고 학계와 협의한 것”이라면서도 “병원에서 관련 지식이 없다거나 하면 의료법에 의해서도 거부가 아니다. 우리 병원에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만, 의료진의 가치관이 개입되지 않도록 상담 프로토콜이 만들어졌다. 수가를 적용한다는 것은 국가가 비급여로 놓고 있지 않고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한편, 손 과장은 인공임신중절 관련 정보 제공을 위해 인구보건복지협회와 ‘러브플랜’ 홈페이지를 개편했다고 밝혔다.
개편된 홈페이지에는 ‘상담분야’가 새롭게 추가됐다. 분야별 전문가(산부인과 5명, 전문상담사 3명)의 상담을 온라인, 전화, 대면(화상) 등 이용자가 원하는 방법으로 지원한다.
상담은 성 건강, 임신·출산, 임신의 유지·종결에 대한 건강 상담, 지원기관 안내, 전문기관 연계, 임신·출산에 대한 부담감 해소 등을 목적으로 의료(건강), 사회복지(정책), 정서지원(심리)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특히 온라인 상담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전화와 대면(또는 화상) 상담은 평일 9시부터 18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대면(또는 화상) 상담은 전화 또는 온라인으로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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