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노장이 검을 휘두르며 마귀를 물리친다. 적을 마주 보는 두 눈에선 굳은 결의가 엿보인다.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위쳐’ 속 괴물 사냥꾼 게롤트(헨리 카빌)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모습일까. 가수 나훈아는 신곡 ‘맞짱’ 뮤직비디오에서 무협 영화 속 주인공이 돼 악당 ‘시마왕’을 칼로 무찌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냅다 ‘테스형!’이라 부르던 노장의 기개는 늙을 줄을 몰랐다.
나훈아와 ‘맞짱’을 뜨는 시마왕은 인간들로부터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빼앗아 간 존재로 묘사된다. 뮤직비디오에서 나훈아는 시마왕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고단한 여정을 떠난다. 설산과 사막, 불구덩이를 지나 만난 시마왕은 다름 아닌 젊은 시절 나훈아. 둘은 칼을 내려놓고 주먹다짐으로 승부를 겨룬다. 소속사 예아라예소리는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끌려가긴 싫어 세월과 ‘맞짱’이라도 한번 붙어보자며 어깃장을 부리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가황의 깜짝 변신에 2030 세대는 환호했다. SNS에선 “K-위쳐” “뮤비가 아니라 무비” “마블 스튜디오가 만든 새 드라마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최신 시각효과기술(VFX)로 화려한 화면을 구현한 덕에 영화 ‘반지의 제왕’, ‘듄’, 드라마 ‘왕좌의 게임’, ‘태왕사신기’ 등 대작들도 비견된다.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인기급상승 음악 순위에서 아이돌 가수 태연, 스테이씨, 엔믹스에 이어 4위를 지키고 있다.
‘맞짱’ 뮤직비디오가 판타지 무협 영화를 방불케 한다면, 25일 공개된 또 다른 신곡 ‘체인지’(Change) 뮤직비디오는 3분48초 동안 풀어낸 현대미술에 가깝다. 모든 것을 뒤바꿔 놓는 사랑의 힘을 마술에 빗댄 이 노래에서 나훈아는 “이 세상이 달라진 건 1도 없는데” “네가 있어 찐 찐 좋아”라며 신조어로 고백한다. 후렴구에선 2010년대 K팝을 지배했던 오토튠(기계음)도 넣었다. 뮤직비디오는 더 파격적이다. 나훈아는 우주와 궁전을 누비다 못해 팝핑 크루 월드 페임 어스와 함께 춤까지 춘다. 음악계에선 “포토몽타주, 비디오아트, 댄스 등을 담아내 현대미술 집합체 같은 느낌”(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968년 데뷔해 라이벌 남진과 함께 1970·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나훈아는 2008년 불미스러운 소문에 휘말린 뒤 10년 넘게 무대를 떠나 있었다. K팝 주 소비층으로 떠오른 2030 세대는 그를 성대모사 대상으로만 기억했다. 인식이 뒤집힌 건 2020년 9월, KBS가 추석을 맞아 나훈아의 비대면 공연을 방영하면서다. 무대 위로 배, 기차, 천사가 나타나고, 컴퓨터그래픽으로 코로나바이러스를 불태우는 연출에 젊은 세대는 넋을 놓고 마음을 뺏겼다. 같은 해 발표한 노래 ‘테스형!’은 각종 패러디를 낳으며 끊임없이 회자됐다.
김도헌 평론가는 “신곡 뮤직비디오가 온라인에서 ‘밈’(Meme)으로 번지며 또 한 번 호응을 얻는 것”이라고 봤다. ‘짤’(사진)로 소통하는 데 익숙한 2030 세대에게 나훈아의 파격 변신이 새로운 놀이거리를 줬다는 분석이다. 김 평론가는 “나훈아의 이름만 알고 음악세계는 잘 모르던 젊은 세대가 2년 전 추석 특집으로 방영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보고 압도적인 무대 연출에 열광했다”면서 “베테랑 아티스트인 나훈아가 젊은 층에게도 다가가려 한다는 점에서 (‘맞짱’, ‘체인지’ 등이) 의미 있는 행보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