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 청년의 비보…드라마 현장 잔혹사 왜 계속되나

34세 청년의 비보…드라마 현장 잔혹사 왜 계속되나

기사승인 2022-03-04 16:49:52
스튜디오S 고 이힘찬 드라마 프로듀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전국언론노동조합·전국언론노동조합SBS본부·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민주노총법률원·돌꽃노동법률사무소, 이하 대책위)가 3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 규명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자금계획이 담긴 엑셀 파일, 촬영 스케줄표, 단역 배우 정리 리스트, ‘오늘까지.’ 업무 기록만 빼곡하던 메신저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버겁다”는 말만 남았다. 그는 상반기 방송을 앞둔 드라마의 제작진이었다. 과로를 견디던 그는 결국 1월 끝자락에 세상을 등졌다. 드라마 촬영 20여 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10년 전 입사하며 썼던 증명사진은 그의 영정사진이 됐다. 올해 만 34세, 그의 이름은 이힘찬. SBS 자회사 스튜디오S 소속 드라마 프로듀서(PD)다.

고 이힘찬 PD 사망 사건은 한 달여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유족과 사측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아서다. 스튜디오S 고 이힘찬 드라마 프로듀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전국언론노동조합·전국언론노동조합SBS본부·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민주노총법률원·돌꽃노동법률사무소, 이하 대책위)는 3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측에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이 자리엔 고인의 동생 등 유가족도 함께했다.

이힘찬 PD는 2012년 SBS 제작운영팀으로 입사해 2017년 드라마운영팀으로 전보됐다. PD로 직무가 바뀐 이후 2020년 SBS 드라마본부가 스튜디오S로 분사하며 전직해 드라마 예산과 스케줄 관리 등을 담당했다. ‘사의찬미’, ‘초면에 사랑합니다’, ‘아무도 모른다’ 등을 담당했다. 사망 당시까지 맡은 작품은 상반기 편성 예정인 SBS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다. 

유가족이 공개한 고 이힘찬 PD의 메신저 기록. 

“이 PD 죽음, 과도한 노동 때문…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고안해야”

대책위와 유가족은 동료 증언과 업무 자료 등을 바탕으로 이 PD의 죽음이 과도한 노동에서 비롯됐다고 파악했다. 이들에 따르면, 밝고 활달하던 고인은 드라마 촬영이 시작된 이후부터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힘들다는 말을 종종 했다. 고인의 메신저에는 업무 관련 기록들이 빼곡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CG 우선 요청 리스트’라는 문서가 남아 있었다. 

대책위와 유가족은 지난달 21일 노조를 통해 SBS와 스튜디오S에 노사공동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 구성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틀 뒤인 23일 SBS와 스튜디오S는 조사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SBS는 “별도 법인에서 일어난 일이라 책임이 없다”고, 스튜디오S는 “유가족과 성실하게 이야기하면 될 뿐 노사 공동 조사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유가족은 사측과 만나 고인이 사망하기까지의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고인이 제작비와 촬영 스케줄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건 인정하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해 어려움을 해소했다”고만 말했다. 퇴직금 정산 외에는 별다른 연락도 없었다. 스튜디오S는 명확한 사태 수습 없이 4일 제작 PD 계약직 경력 채용 공고를 냈다.

대책위는 “이 PD의 사망은 드라마 제작현장의 구조적 문제가 얽힌 사회적 타살”이라면서 “고인 이름과 드라마가 알려지고 현장 동료들에게 영향이 미칠 것을 염려했지만, 원인을 밝혀내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만드는 게 옳은 길이어서 공개 대응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고인 동생 이희씨는 “형은 과중한 업무를 버티지 못해 ‘모든 것이 버겁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떠나갔다. 하지만 사측은 ‘힘들다고 토로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라는 말로 유족에게 상처를 남겼다”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공동조사가 무산될 경우 유가족과 단독 조사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사진은 본문과 관련 없음. 픽사베이

계속된 비보… “경쟁 심한 현실, 근로기준법 준수부터 출발해야”

2017년 tvN ‘혼술남녀’ 고 이한빛 PD 사망 사건 이후 5년이 지났다. 비보는 되풀이됐고, 변화는 없다. 콘텐츠 무한 경쟁 시대, 방송계 노동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웹 드라마와 OTT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드라마가 선보여지면서 경쟁은 더욱 가속화됐다. 주요 콘텐츠 제작사, 방송사, OTT 모두 올해 제작편수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주 52시간 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나 초과 노동은 ‘재량 근무’라는 미명 하에 여전히 존재한다. 대책위는 “OTT 서비스 이후 드라마 제작 기한부터 제작비 산정 등 부담이 심화됐다”면서 “고인의 업무용 노트북에도 드라마에 배정된 부족한 예산과 추가 인력이 없을 경우 어떻게 제작을 진행해야 하는지 등 해결되지 않은 괴로움이 담겼다”고 꼬집었다.

주 52시간은 드라마 스태프에게 다른 세상 이야기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도 방송 제작 인력의 장르별 근로시간은 교양(42.1시간), 예능(43.2시간)을 제치고 드라마가 47.3시간으로 가장 높았다. 2020년부터 주 52시간 제작제도가 도입됐으나, 비정규직 노동 인력은 28.2%만이 이 제도를 경험 중인 것으로 응답했다. 지난해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가 드라마 스태프 3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1 드라마 스태프 노동실태 긴급 점검 조사에서는 전체 응답자 중 약 40%가 일평균 실질 노동 시간 12~14시간 이내, 약 30%가 14~16시간 이내라고 답했다. 2020년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71.2%가 드라마 현장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장시간 노동을 꼽았다. 드라마 스태프들은, 여전히 과도한 노동의 그늘 속에 있다.

업계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까. 관계자들은 경쟁이 심화된 현재의 환경이 문제라고 봤다. 한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OTT 등장으로 드라마 제작 편수가 늘고 제작비 경쟁이 심해졌다. 작품성이 높은, 영화 같은 드라마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면서 “일반 드라마는 제작비 조달에 한계가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이후로는 확진자 발생으로 제작 일정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제작자, 현장 노동자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사전제작이 노동환경 개선의 대안으로도 제시됐으나, 현장 관계자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기존 노동 관행이 고착화된 만큼 사전제작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면서 “미국, 영국 등 선진국 사례처럼 정부가 나서서 근로계약서 시스템부터 재정비해야 한다. 모든 제작진과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한 노동시간 책정과 실질 임금·연장 근무·야간 수당 등을 보장하는 게 당연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드라마 제작 스태프 중 근로계약서를 체결한 사람은 전체의 21.3%에 불과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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