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찾은 서울 은평구 원효조경 양봉농장. 두 줄로 길게 세워진 벌통 사이를 오가던 농장주 모순철 한국양봉협회 고양시 지부장의 얼굴이 핼쑥했다. 이맘때면 벌통 사이를 극성스럽게 날아다니던 벌들이 눈에 띄게 사라진 탓이다.
월동 중인 벌을 깨워 먹이를 주는 ‘봄 벌 깨우기’ 과정에서 꿀벌이 사라졌다. 그는 “200통 중 자그마치 50통이 텅 비어있었다. 200만 마리가 사라졌다”라며 “고양시 양봉농장의 약 70%가 피해를 봤다. 이런 상황이라면 올해 목표는 꿀을 얻는 게 아니라 벌을 보존하는 것이다.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라고 울상지었다.
꿀벌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주요 원인은 기후변화다. 인간이 초래한 이상 고온 현상이 봄꽃개화 시기를 앞당겼다. 이는 꿀벌에게 영향을 미쳤다. 꿀벌이 사라져 망가진 생태계는 곧 인류의 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광주·전남 지역의 주요 봄꽃 개화 시기가 앞당겨졌다. 개나리는 3월14일, 진달래는 3월24일, 벚꽃은 3월25일 개화했다. 각각 평년(1991~2020년)보다 7일, 3일, 6일 일찍 폈다.
지난해에는 서울의 벚꽃이 100년 만에 가장 이르게 개화했다. 서울 종로구 서울기상관측소에 지정된 왕벚나무를 기준으로 3월24일 개화했다. 1922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빠르다. 평년보다 17일이나 앞섰다. 기상청은 최근 30년 사이 3월 평균기온이 높아지면서 봄꽃 개화 시기가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기후변화는 봄꽃이 피는 순서마저 뒤바꿨다. 식물은 저마다 일정한 ‘적산온도’를 채워야 꽃망울을 터뜨린다. 동백·매화를 시작으로 목련과 개나리·진달래·벚꽃·철쭉 순으로 차례차례 꽃을 피운다. 그러나 봄꽃들이 한꺼번에 만개하는 현상이 나타난 지 오래다. 겨울의 이상고온이나 봄철 이상저온으로 봄꽃의 생체시계가 고장난 탓이다.
문제는 봄꽃 개화 시기의 변화가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꽃의 개화시기가 불규칙해지면, 식물의 생장과 번식뿐만 아니라 매개 곤충의 활동 시기도 변한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생물들은 멸종한다. 조은아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봄철 이상고온현상으로 봄꽃이 동시다발적으로 피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기후위기 현상 중 하나다. 생태계 전반에 교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 우려스럽다”라고 말했다.
꿀 흉작과 꿀벌 소멸 사태도 이상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양봉협회가 월동 봉군 소멸피해 전국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회원 2만3697농가 중 17.61%인 4173농가에 피해가 발생했다.
벌 부족 사태는 과일값 폭등으로도 이어진다. 수박·딸기·참외 등은 다른 과일 품목과 다르게 ‘벌에 의한 꽃가루받이’ 과정이 필수적이다. 꿀벌 의존도가 높은 국내 농업이 타격을 받으면 과일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전문가는 꿀벌 실종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기상이변을 지목했다. 벌은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곤충이다. 지난 2년간 평년에 비해 겨울 기온이 높아지면서 꽃이 일찍 개화했다. 벌들이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5~6월에는 저온·강풍·강우로 꿀을 수집하기 어려웠다. 꿀은 꿀벌의 면역을 높이는 중요한 영양분이다. 양질의 꿀을 먹지 못하며 자란 일벌은 약해진다. 꿀벌을 숙주로 삼는 외부 기생충 ‘응애’에도 대응하지 못한다. 응애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활개를 친다.
악순환은 이어졌다. 꿀벌이 발육해야 하는 9월~10월엔 저온 현상이 나타나 꿀벌들이 월동에 들어갔다. 11월~12월 중순에는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졌다. 기온이 올라가면 여왕벌이 산란한다. 월동해야 할 일벌들은 화분 채집에 나섰고, 체력이 소진돼 벌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꿀벌의 실종은 인류에게도 큰 위기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세계 100대 작물 중 71%가 꿀벌을 매개로 수분한다. 꿀벌이 없으면 과일·채소 등 생장에 타격을 받는다. 식품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면 인간의 삶도 큰 영향을 받는다.
최용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꿀벌육종환경실장은 “벌은 지구 생태계의 유지·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꿀벌이 멸종하면 부유층이 식량자원을 독점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수년 내에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해진다는 연구보고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결국 모든 것은 기후위기와 연관되어 있다”고 경고했다.
권우현 환경운동연합 운동가는 “기후변화는 작물 공급량 감소, 작물 값 상승으로 이어져 세계적인 식량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 중립 정책과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정부 차원의 중장기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