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짝만 남은 구두, 흙과 먼지로 뒤덮인 운동화,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는 흰 코트. 주인 없이 돌아온 유실물들은 이태원 참사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소지품을 찾으러 온 참사 생존자도 처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 1층에 이태원 참사 관련 유실물 센터를 31일 열었다.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물품을 생존자 및 유족에게 인계하기 위한 취지다. 센터는 오는 6일까지 24시간 운영한다.
희생자들이 남긴 유품들은 넓은 유실물 센터 바닥을 가득 채웠다. 핼러윈을 즐기기 위해 청년들이 입었던 의상과 장신구, 신발 등이 나열돼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모습과 달리 상태는 좋지 못했다.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수백 개의 신발, 찢어진 옷가지들이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깨진 안경과 단추가 떨어진 모자도 눈에 띄었다.
짝이 없는 신발 66개도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 참사로 희생된 피해자 다수는 신발을 신지 못한 채 발견됐다. 압사 사고 특성상 서로 발을 짓밟으며 벗겨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현장의 참혹함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다.
현재 수집된 유실물은 1.5t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방 124개, 옷 258점, 신발 256켤레, 기타 전자제품 156개 등이다. 유실물은 참사가 발생한 세계음식거리와 이태원역 인근에서 수집됐다. 경찰은 “당시 사고 피해자들이 이태원역 앞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CPR)을 받았기 때문에 수집 지역을 넓혔다”며 “이 중 가방 1개 등 3점의 유실물은 전날 희생자 가족이 회수해갔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수거한 신분증과 휴대전화는 용산서 형사과가 별도로 보관 중이다. 유실물 센터에는 그 밖의 물품만 비치돼 찾아갈 수 있다. 귀중품의 경우 가족 관계 확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참사 생존자도 유실물 센터를 찾았다. 당시 사고 현장에 있었던 장여진(22·여)씨다. 골절상을 입어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상태였다. 장씨 손에 들린 작은 손가방은 인파에 짓밟힌 듯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어있었다.
장씨는 주변 점포의 여유 공간 덕에 목숨을 건졌다. 그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성 몇 명이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인파에 휩쓸려 골목 중간까지 내려왔는데 위에서 누가 ‘어어’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고 회상했다. 이어 “저도 숨이 안 쉬어지는 상황이었는데 술집 공간으로 운 좋게 상반신을 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주변에 있던 시민들의 도움이 컸다고도 했다. 장씨는 “제가 숨을 잘 못 쉬니까 누군가 물을 뿌려주고, 얼굴을 툭툭 만지면서 정신 차리라고 격려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변 상인들이 깔린 사람들을 빼내려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잡아끌었지만 절대 빠지지 않는 상황이었다”라며 “최소한의 숨만 쉬면서 기다리다가 오후 11시가 넘어서 구조됐다”고 했다.
사고 소식은 장씨가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 비상 전화를 통해 전달됐다. 장씨 아버지는 전화 너머 비명만 들릴 뿐, 딸의 대답이 없자 위험을 직감했다. 현장에 도착한 아버지는 장씨를 업고 6호선 한강진역까지 쉴 새 없이 달렸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어머니 차를 타고 근처 응급실로 이동해 치료를 받았다.
“살아남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희생자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담담하게 당시 상황을 풀어내던 장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가늘게 떨렸다. 그날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그늘진 표정이었다.
29일 오후 10시17분 이태원 해밀턴호텔 인근 좁은 내리막길에 인파가 몰리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인명 피해는 31일 오전 6시 기준 사망자 156명, 중상자 29명, 경상자 122명 등 총 307명이다. 피해자 대다수는 10대~20대로 파악됐다. 참사 당시 좁은 골목길에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들어찼다. 사람들이 5~6겹으로 넘어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정부는 용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참사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5일 밤 12시까지 일주일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지정했다.
유실물 관련 문의는 용산경찰서 생활질서계(☎02-2198-0109·0111)로 하면 된다. 이날 현장에서 정리한 유실물 정보는 ‘로스트112(경찰청 유실물 종합관리시스템)’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로스트112’ 주소는 ‘www.lost112.go.kr’ 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