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은 출혈이 잘 멈추지 않는 희귀질환이다. 우리나라에는 약 2000여명의 환자가 등록돼 있다. 아직까진 완치 방법이 없다. 다만 꾸준히 치료와 관리를 한다면 일상생활도 누릴 수 있다.
23일 ‘희귀질환 극복의 날’을 맞아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정우 세브란스병원 소아혈액종양과 교수는 “혈우병 환자들은 단순히 응고인자가 결핍된 것이므로, 응고인자만 주사하면 정상적인 수준이 되어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다”며 “만성질환처럼 철저하게 관리할 경우 수술이든 운동이든 전부 가능하다”고 밝혔다.
혈우병은 ‘응고인자’라는 단백질이 결핍된 상태로 태어날 때 앓게 되는 출혈 질환이다. 유전자 변화로 나타나기 때문에 주로 선천적으로 발생한다. X염색체에 있는 응고인자 8번, 9번이 결핍되면 각각 혈우병A, 혈우병 B가 된다. 드물게 후천적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자가면역질환과 비슷해 증상만 같을 뿐 다른 질환이라 할 수 있다.
혈우병은 대부분 남성에게 발현된다. 여성의 경우 X염색체가 2개이므로 둘 중 1개가 정상이면 혈우병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한 교수는 “X염색체 2개가 모두 이상이 있을 경우 태어나기조차 어렵지만 드물게 혈우병을 겪는 사례가 있다”며 “성염색체가 아닌 상염색체에 이상이 있는 경우 남녀 모두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혈우병 환자여도 혈액응고인자의 활성도에 따라 출혈 정도와 빈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응고인자 활성도가 1% 미만으로 거의 없는 상태는 중증, 활성도 1~5% 수준은 중등증, 5% 이상을 경증으로 구분한다. 그는 “중증에선 출혈이 매우 자주 일어나지만, 경증 수준만 되더라도 다칠 때 이외에는 출혈을 경험하지 않는 비율이 높아 혈우병인지 모르고 지내다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도 흔하다”고 밝혔다.
혈우병은 혈액 검사를 통해 진단한다. 다만 인지가 어려운 편이라 진단 검사를 받기까지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교수는 “한국은 외국에 비해 진단이 늦은 편”이라며 “외국은 가족 중에 혈우병 혹은 출혈 질환이 있다는 내용을 충분히 인지하고, 의사와 상담을 진행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 6개월 내 발견하는 비율이 높다. 미국은 30%가 1개월 내로 진단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우리나라는 가족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중증의 경우 1살 전후에 멍이 많이 들거나 움직임으로 인한 출혈을 겪고 통증을 호소하면 응급실에 방문해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 교수는 “특히 경증인 경우 이를 알아차리기 힘든데, 60~70대에 뇌출혈로 인지하는 사례도 있다”며 “만약 미리 진단해 질환을 알았다면 대비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혈우병은 합병증 발생 비율이 높아 조기에 진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합병증으로는 무릎 관절 손상이 대표적이다. 노년층처럼 다리가 아픈 증세가 일찍 나타나고, 악화되면 이른 나이부터 인공관절 등의 수술을 받아야 하는 수준에 이른다. 또 뇌출혈, 장 출혈 등 생명을 위독하게 하거나 장기를 손상시킬 정도의 ‘중증 출혈’ 위험도 존재한다.
혈우병으로 진단 받으면 1주일에 2번가량 응고인자를 주사로 투여해 치료를 받는다. 한 교수는 “혈우병은 꾸준히 치료를 받고 관리해야 하는 질환”이라며 “일주일에 2번 정도 투여를 해야 하는 점이 어려울 뿐 만성질환처럼 관리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제때 치료만 받는다면 수술, 운동 등 일상생활도 가능하다. 그는 “수술에 대한 걱정으로 환자도 의사도 수술을 꺼리기도 하는데, 혈우병 환자들은 단순히 응고인자가 결핍된 것이다. 응고인자를 주사하면 정상적 수준이 돼 수술도 문제 없이 진행할 수 있다”며 “격투기, 산악자전거와 같이 일반인에게도 위험한 운동이 아닌 이상 웬만한 운동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전제조건은 ‘꾸준한 치료’다. 혈우병 캠프를 통해 소개된 사례에 따르면, A씨는 치료를 소홀히 한 1년을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시기로 꼽았다. 소아·청소년 시기 부모가 관리해주는대로 주기적으로 주사를 투여해 큰 불편감을 느끼지 않다가 부모로부터 독립한 뒤 관리를 소홀히 해 ‘관절 손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소아청소년 시기 부모님의 꾸준한 관리로 아픈 경험이 없다가 어른이 돼서 관리를 제대로 안 하는 경우가 많다”며 “혈우병 환자가 응고인자를 제대로 투여하지 않으면 관절 출혈이 미세하게 계속 발생해 돌이킬 수 없는 관절 손상이 일어난다”고 경고했다.
아직 혈우병 완치 방법은 없지만, 신약 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 치료 전망이 밝은 편이다. 한 교수는 “약 10년 전부터 다양한 혈우병 신약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8시간가량인 반감기를 연장하기 위한 시도들이 지속되고 있다”며 “최근엔 혈우병 자체를 치료하기 위한 유전자 치료제도 개발되는 등 많은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혈우병 환자의 일상생활 자유도를 높이기 위해선 정부가 보험 급여 조건이나 횟수 등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환자가 내원했을 때 처방할 수 있는 약의 용량이나 횟수가 정해져 있다. 출혈이 잦은 환자의 경우 정해진 용량을 모두 사용하면 매번 병원에 방문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다”며 “정부에서도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보다 많은 용량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지금보다 더 유연하게 용량을 처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 교수는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정부 정책 지원, 치료제 개발 등에서 혈우병 치료 여건이 개선되고 있다. 치료 옵션이 다양화되고 있고, 치료제 발전이 앞으로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주기적으로 주사를 투여하는 것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꾸준히 치료를 받아 건강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