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중간이 없어요. 아주 크거나, 아니면 작거나.” 얼마 전 쿠키뉴스와 만난 배우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출연한 작품은 비교적 예산이 적게 들어간 속칭 ‘작은 영화’다. 한국영화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극장가에선 규모가 큰 블록버스터와 저예산 영화 외 허리급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제작비 100억원 안팎이 투입되는 중간급 영화는 장르 다양성을 책임지는 역할 외에도, 독립영화계에서 실력을 쌓은 신진 감독의 성장 보고로 꼽힌다. 한국영화계에 ‘진짜 위기’가 도래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팬데믹을 거치며 한국영화는 움츠러들었다. 코로나19 확산과 티켓 가격 상승, OTT 플랫폼 대두 등으로 관객 수가 크게 줄었다. 외부 환경 변화에서 기인한 위기다. 더 큰 문제는 내부 상황에 있다. 개봉일도 잡지 못한 채 표류 중인 영화가 100편 이상 쌓이면서 투자가 위축됐다. 팬데믹 시기 외국 자본을 등에 업고 내수시장이 감당 불가할 정도로 콘텐츠를 과잉 제작한 것 또한 위기에 한몫했다. 통상적으로는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투자를 제작·개봉 단계에 각각 나눠 진행한다. 하지만 개봉이 줄줄이 밀리면서 제작 단계에 투입했던 투자금 회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동시에 콘텐츠는 늘어나며 배우와 스태프, 제작 인력의 출연료 및 임금이 상승해 제작단가는 이전보다 큰 폭으로 높아졌다. 신작에 투자하고 싶어도 총알이 부족하다는 게 영화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한국영화계를 떠받드는 CJ ENM가 휘청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 CJ ENM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연결 기준 1374억원으로, 전년 대비 53.7% 줄었다. 매출은 늘었으나 순손실이 1768억원에 달하며 적자 전환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엔가이드는 CJ ENM의 올해 영업이익을 지난해보다 34% 추가 감소한 906억원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배급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엔데믹으로 접어들며 한국영화계 전반에 회복 기대감이 생겼지만, 지난해 여름 개봉한 대작들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손실이 컸다”면서 “투자·회수 등 순환 구조가 망가져 투자 심리가 경직된 상황”이라고 짚었다.
제작 규모의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다양성은 희미해진다. 저예산 영화는 적은 시간과 자본으로 제작해야 하는 만큼 색다른 시도를 할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 대형 자본을 투입한 영화는 투자금을 안정적으로 회수하기 위해 모험을 꺼린다. 흥행만을 노리다 보니 과거 인기였던 소재를 되풀이하거나 기존 시리즈 속편 제작에 집중한다. 영진위가 제공하는 연도별 박스오피스 순위를 보면 지난해 흥행 순위 10위권에 든 국내 개봉작 중 속편 영화만 8편에 달했다. ‘범죄도시2’·‘한산: 용의 출현’ 등 한국영화와 ‘탑건: 매버릭’·‘아바타: 물의 길’을 비롯한 외국영화가 각각 4편씩 차지했다.
팬데믹으로 산업 지형이 바뀐 것 역시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신인감독 작품이거나 중소형 영화여도 배급사 자체 판단 하에 극장에 걸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또 다른 배급 관계자는 “현재는 수익 증대를 위해 관객의 영화 선호도를 최대한으로 고려한다. 그렇다 보니 작품 특색과 관계없이 경쟁력이 약하다고 판단하면 개봉 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관객 수가 회복세인 건 희망적이다. 관객이 늘면 극장 수입이 증가한다. 국내 영화계 수익 구조가 상당부분 극장에 의존하는 만큼 관객이 영화관을 다시 찾는 게 중요하다. 6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3241만4128명에 불과하던 국내 관객 수는 올해 동 기간 5838만9902명으로 2배가량 늘었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 동기 대비 절반 이상을 회복했다.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의 ‘쌍천만’ 흥행 열기가 훈풍을 불어넣었다. 업계 정상화를 위해 정부도 나섰다. 기획재정부가 지난 4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는 한국영화 개봉 지원 투자 펀드 조성안이 담겼다. 이외에도 정부는 자금 순환 및 재투자를 위해 중소배급사의 한국영화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제작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쓴소리도 나온다. 박준서 SLL 제작총괄은 지난 4일 상반기 성과 발표 자리에서 “팬데믹을 거치며 드라마는 비즈니스 모델이 크게 달라진 반면 영화는 변한 게 없다”면서 “한계치에 다다른 기존 모델에서 벗어나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영화를 골라보는 경향이 강해진 ‘엔데믹 관객’ 마음을 돌리는 건 숙제다. 답은 작품에 있다. 배급 관계자는 “극장가에 활기가 돌면 괜찮은 영화부터 개봉 시기를 잡는다. 재미있으면 입소문이 나고, 관객은 자연히 극장을 찾는다”면서 “지난해 빅4 영화가 1500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올여름 빅4 영화는 3000만 관객을 모아보길 희망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