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의료체계에 빨간불이 켜지고 아동 건강권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검토되고 있다. 의료계에선 소아·청소년에 대한 국가·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명시하고, 소아 건강을 유지 관리할 수 있는 통합적 입법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가칭)’ 제정을 위한 연구가 한창이다. 소아·청소년 보건의료체계를 통합적으로 혁신할 필요성에 공감한 의료계가 한자리에 모여 법제화를 포함해 아동 건강권 보장을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논의했다.
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와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 제정 추진위원회(가칭) 주최로 열린 ‘소아·청소년 건강권 보장을 위한 법제화 정책 포럼’에서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 제정의 필요성을 두고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은 아이가 태어나 건강한 성인이 될 때까지 생애주기에 맞춰 국가와 지자체가 통합된 의료, 보건, 복지 시스템을 갖추도록 규정한 법안이다. 지난해 11월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대한아동병원협회, 수련병원, 분과학회, 소아·청소년과의사회 등 소아·청소년과 관련 단체 연합이 TF를 만들어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대란 등 소아진료체계의 붕괴의 원인이 어린이 건강과 양육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과 무책임이라고 본다. 소아·청소년 건강을 통합적으로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정부의 전담 부서가 없고, 보건의료를 지원할 법률들조차 성인을 위한 법률에 산재 돼 통합적인 기본법도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배건이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현행 보건의료법제를 보면, 공적 의료 영역인 공공보건의료법에는 아동과 관련된 조문이 하나도 없다”며 “국가가 의료 재원을 투자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공공보건의료 영역에서라도, 적어도 아동과 관련된 보건의료기관 시설 인력 확보에 있어 일정선 이상 확보할 것을 원칙으로 정하고, 공공보건의료 정책 시 기본사항을 수립할 때 아동보건의료에 대한 지속적인 의료 공급이 이뤄질 수 있도록 법률로 정해 놓으면 해당 부처 내에선 이를 가지고 사업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보기에 그냥 흘러가는 조문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를 통해 복지 영역은 정책을 고려하는 부분이 늘어난다”며 아동 관련 보건의료법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소아·청소년 건강 관련 관할 주체가 보건복지부, 교육부(학교보건법) 등으로 나누어진 현실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배 연구위원은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이 제정되면 교육부와 보건복지부가 가장 크게 고민할 것”이라며 “영유아 예방접종은 질병관리청에서 관리하고, 학생 건강은 학교 보건으로 교육부가 관할해 나이스(NIES) 시스템에 접속해야 확인할 수 있다. 또 아동 학대와 관련된 부분은 보건복지부가 관리하면서 서로 (자료가) 연동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나눠진 것들이 연계되고 통합되지 못해 실질적으로 현장에선 서로 관할권을 두고 충돌하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입법 과정에서 필요한 건 아동의 성장과 발달 단계에 세부적으로 연동돼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려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지혜 쿠키뉴스 기자도 “소아과 감소에 영향을 주는 요인 중 하나로 ‘저출산’이 꼽힌다. 반대로 아이를 진료할 의사가 줄어든다는 것은 역으로 부모들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이 40도까지 오른 아이와 응급차를 타고 응급실에서 거부당해 뺑뺑이를 돌았다’ ‘소아과의사가 퇴근했다는 이유로 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를 거절했다’ 등의 취재 중 만난 부모들의 실제 사례를 전했다.
임 기자는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느냐고 물었다”라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아동의 행복과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국가와 지자체, 의료의 역할과 책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을 두고 전문가들은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동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강은식 대한아동병원협회 의무부회장은 “아이를 잘 낳고 키울 수 있는 것이 (소아과 의사의) 역할이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임신과 출산을 이어가며 좋은 세대를 가꾸어가는 것이 목표”라며 “이 법이 당장 가시적인 효과는 없겠지만 10~20년 후에는 중요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창하 대한소아심장학회 이사장도 “국내에서 경험 있게 아동 심장 수술을 할 수 있는 분은 20명도 안된다. 5~10년 후에 새로 심장 수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으면 아기들 심장 수술이 힘들지 않을까”라며 “심장 수술은 성인과 달리 소아의 경우 굉장히 오래 걸리고 수술 후 중환자실 치료도 다르다. 반면 그에 대한 보상은 열악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설이나 인력 등이 제대로 갖춰질 수 있는 기본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은 사안의 시급성을 따져 기존 법안의 개정 작업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최은화 전국국립어린이병원협회 회장은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과 유사한 일본의 성육기본법(2018년 제정)이 제정되는데 10년이 걸린 사실을 전하면서 “우리나라의 여러 (아동 건강 관련) 법령이 있는 만큼, 제정과 개정 중에서 더 빨리 아동의 건강에 대한 의료 서비스 제공 범위나 기준 또는 의사의 의무·책임·지원 등을 반영할 수 있는 개정의 방향도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소아·청소년 건강기본법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료계는 앞으로 내부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학부모 단체 등과 연계해 입법이란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계획이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 부회장은 “우리나라가 아이들을 키우기 좋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며 “소아 의료 위기에 당면한 상황이지만, 당장의 CPR 상황을 타개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기획으로 노력해 나가려 한다”고 했다.
김지홍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이사장은 “소아과 대란 문제를 보면 제일 걱정하는 사람이 국민들이고, 이에 못지않게 걱정하는 사람이 의사들이다”며 “국가도 걱정은 하고 있지만,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 것 같다. (국가에) 의무가 규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본법과 전담 부서가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김 이사장은 “우선은 집(개정)을 고쳐 쓰고 전세로 살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기본법이라고 하는 안정된 기반이 있어야 한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