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의 ‘그린워싱’…화장품을 없앴다 [빼봤더니]

내 일상의 ‘그린워싱’…화장품을 없앴다 [빼봤더니]

한 번에 27개 화장품, ‘화장품 다이어트’ 해봤더니
매일 챙겨 바른 앰플·에센스·세럼…같은 성분
화장품 용기 63% 재활용 불가능해

기사승인 2023-08-28 06:05:02
화장품으로 가득 찬 화장대. 안 쓰는 것들은 다 갖다 버렸지만 화장품은 여전히 서랍에도 한가득이다.

“아니, 화장품이 그렇게 많으면서 또 샀어? 정리해서 안 쓰는 건 좀 갖다 버려!!!!”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싸게 산 프라이머 포장지를 뜯고 있었더니 엄마가 뒤에서 소리쳤다.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아 알겠어 알겠어, 대충 대답하고 방으로 쏙 들어왔다. 그래 화장대 정리 한번 할 때 됐지. 

색은 예쁜데 자꾸 액체가 뚜껑 사이로 새서 화장대 구석으로 밀려난 틴트, 묘하게 발색력이 나빠서 안 쓰는 섀도우, 절반도 못 썼는데 유통기한이 지난 수분크림, 새 브러쉬를 산 이후 존재가 잊혀진 낡은 브러쉬까지… 아까웠지만 둬 봤자 먼지만 쌓일 게 분명했다. 과감하게 쓸어담자. 오늘도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방생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분리수거라도 해야겠다 싶어 화장품 용기를 이리저리 돌려 성분 표시를 찾았다. 하지만 대부분 아무 표시가 없거나 ‘재활용 어려움’, ‘OTHER’ 이라고 쓰여 있었다. 헐. 설마 이거 분리수거 안 되나?

재활용이 어렵다고 쓰여 있는 화장품 용기.

화장품 다이어트 시작

두 시간에 걸쳐 대충 정리를 끝냈다. 대략 이 킬로그램 상당 화장품을 버렸다. 색은 비슷하지만 텍스쳐가 다르다며 홧김에 지른 화장품들은 잘 손이 가지 않아 수명을 다해서 버려야 했다. 뜯지도 않고 방치된 새 화장품도 많이 찾았다. 평소 너무 피곤한 날이 아니면 간단한 화장은 꼭 하는 편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그래서 일주일간 ‘화장품 다이어트’를 해 보기로 했다. 사용하는 화장품을 점차 줄여서 나한테 꼭 필요한 것만 남겨 보자는 취지였다. 

마침 다음 날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컨실러도 안 바르고 아이라인도 안 그리고, 하이라이터도 생략했다. 그러나 이날 준비하면서 사용한 화장품은 총 27개. 아니 내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가. 섞어 쓰거나 덧바른 제품이 많은 것이 원인(?)이었다. 내일부턴 색조 화장을 과감히 줄여 보기로 했다.

화장품 다이어트 둘째 날, 남자친구랑 데이트가 있었다. 역시나 화장은 했지만 마스카라와 픽서를 추가로 뺐다. 섀도우도 팔레트 하나만 썼다. 바짝 찝은 속눈썹이 없으니 눈이 허전했다. 꾸몄는데도 밋밋한 얼굴이 어색했지만, 평소 대충 하고 다닐 때와 비슷헤서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가장 많이 쓰는 화장품들을 추려 봤다. 기초 제품 6개, 피부 화장품 8개, 색조 화장품 14개다.

다 똑같은 거라고?

문제는 기초 화장품을 줄이기로 마음먹은 넷째 날 부터였다. 한여름에도 얼굴에는 전혀 땀이 나지 않는 극건성 피부. 늘 미스트를 뿌리고 토너패드, 스킨, 세럼, 앰플, 로션이나 수분크림을 차례대로 얹은 뒤 프라이머와 선크림을 발랐다. 일회용 마스크팩도 삼일에 한 번은 뜯었다. 

뭘 줄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내가 가진 기초 제품의 성분을 찾아봤다.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스킨과 토너, 앰플과 세럼과 에센스의 성분은 차이가 없으니 하나씩만 골라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배합 비율이 다를 뿐이라고 했다. 아니 그럼 대체 이름을 왜 다르게 붙인 건데?

묘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대여섯 개 바르던 기초화장품을 확 줄여 토너와 로션만 사용하고 그 위에 무색 선크림을 발랐다. 속이 건조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찐득한 느낌 없이 산뜻했다. 출근길 지하철 화장실에서 본, 피부화장은 커녕 틴트도 바르지 않은 내 얼굴은 조금 낯설었다.  

이틀이 더 지나고, 마지막 날. 세수를 하고,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로 출근했다. 렌즈 대신 안경을 꼈다. 그랬더니 평소와 똑같이 일어났는데도 20분이나 남았다. 늘 준비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서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입사 후 처음으로 아침밥을 챙겨 먹었다.

화장을 하지 않으니 화장을 지울 일도 없었다. 매번 쓰던 화장솜 세 장, 면봉 두어 개, 클렌징 오일과 아이 리무버도 쓸 일이 없었다. 선크림은 클렌징 폼으로도 지워졌다. 삼일에 한 번씩 나오던 마스크팩 껍질을 버릴 필요도 없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출근했다. 잠깐 전화를 받느라 복도에 앉아 있었다.   

재활용 가능한 것 아니었나요 

최근 화장품 업계에서도 친환경이나 비건을 내세운 마케팅을 많이 한다. 동물성 원료를 이용하지 않거나 포장지를 최소화해 파는 곳들도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시중에 있는 화장품 용기 중 63%는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화장품은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여성들을 겁주고 유혹한다. 1일1팩을 해야 피부가 좋아진다, 이십 대 후반 부터는 반드시 아이크림을 발라 주어야 눈가 주름이 덜 생긴다, 관리하는 사람의 피부는 확실히 다르다 등등...

나도 그들의 말을 따라 성분이나 기능도 모르는 화장품을 차곡차곡 바르며 무언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말은 색이 비슷해 구분하기도 힘든 화장품을 계속 구매할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나도 지금까지 그런 명분들에 충실히 따랐고, 한 달에 5~6만원씩을 새 화장품을 구매하는 데 썼다. 

그러나 며칠 화장품을 줄여 사용하다보니 생각보다 화장은 습관이 되는 행위에 가깝다고 느꼈다. 화장품 쓰레기가 그럼에도 같은 종류의 화장품을 더 많이 사들이도록 교묘히 부추기는 마케팅은 과연 옳은가? 화장품을 이렇게 많이 만드는 나라에서, 아직까지도 화장품 용기 재활용 비율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어쨌거나 나는 앞으로도 화장품 다이어트를 이어갈 생각이다. 좋다더라는 말 듣고 충동적으로 사지 않기. 한 종류의 화장품을 하나 이상 갖고 있지 않기. 다 쓰기 전까진 새 것 사지 않기. 누군가에게 선물하지 않기. 마케팅에 홀랑 속아 넘어가지 않기.

글·사진 심하연 기자 sim@kukinews.com

심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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