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9시 영어학원에서 돌아온 중학교 1학년 임모(13)양은 간단한 간식을 먹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학교 수행평가 준비, 학원 숙제를 마치면 자정을 훌쩍 넘긴다. 일주일에 적어도 2번은 자정을 넘겨 잠든다. ‘지금 잘 해둬야 좋은 대학에 가고, 원하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 초등학교 4학년 전모(10)양은 요즘 공부 시간을 늘리고 있다. 자율형사립고에 가기 위해서다. 좋은 고등학교와 좋은 대학교는 좋은 직장으로 가는 필수 코스라고 생각한다. 또래 친구인 김모양도 서울 내 명문대 입학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 “아직 꿈은 없다”는 김양은 “의사가 되는 게 좋다고 해서 A대 의예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은 어렵다. 올해 대졸자·졸업예정자 가운데 절반 가까이(49.7%)가 올해 안에 취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조사 결과(한국경제인협회)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등학교 졸업자의 대학 진학률은 70%가 넘는다. 그러면 한국 청소년들은 왜 대학에 가려 할까.
22일 쿠키뉴스가 만난 10대 청소년 상당수는 대학을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배모(17)양은 “머리로 먹고사는 나라인 한국에서 대학에 가지 않는 건 구직 등에 약점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대학을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게 다수 의견”이라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박모(14)양도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가고 싶다”며 “대학은 높은 위치로 나아가는 첫 단계”고 설명했다.
청소년들에게 대학 졸업장은 개인의 능력과 신분을 대변하는 보증서였다. B(17)군은 “한국에서 저를 증명하는 일 중 가장 쉬운 방법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며 “만약 브라질에서 태어났으면 바리스타나 축구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C(17)양도 “취업할 때 ‘내가 스무 살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가장 쉬운 수단이 학벌이다. 성실하다는 건 대학 입학장 하나면 된다고 생각한다”며 “스무 살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이후 50~60년을 좋은 이미지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효율적인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대학은 진로 강화보단 미래가 불안한 청소년들에게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꿈과 진로가 아닌 전공을 선택하더라도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을 일종의 ‘보험’이라고 표현한 D(17)양은 “사실 대학은 안 가고 싶다”며 “하고 싶은 일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대학에 간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명문대에 입학해 좋은 일자리를 얻겠다는 공통된 꿈은 치열한 경쟁을 불러왔다. 중학교 2학년 최모(14)양은 아직 목표한 대학도, 꿈도 없지만, 매일 자정을 넘길 때까지 공부한다. 최양은 “남들도 공부하니까, 그냥 공부해야 해서 한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박모(13)양에게도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이다. 재밌지 않아도 미래 일자리를 위해 입시를 준비 중인 박양는 “재밌어서 대학 다니는 사람이 솔직히 0.1%나 되겠나”고 말했다.
이 같은 청소년들의 심리엔 한국 사회에서 ‘고졸’로 살기 힘들단 인식이 깔려있다. 실제 직업계고 학생들은 진로가 녹록지 않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달 발표한 ‘2023년 직업계고 졸업자 취업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특성화고, 마이스터고, 일반고 직업반의 올해 취업률은 55.7%로, 지난해(57.8%)보다 2% 포인트 떨어졌다. 대신 진학을 선택한 경우는 늘었다. 졸업생 중 진학자는 3만3621명으로 전체 진학률은 지난해보다 1.8% 증가한 47.0%였다. 특성화고등학생 권리 연합회는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고졸 채용 규모는 줄어들고 승진이나 직급에서 고졸 노동자를 차별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다”며 “현실을 직시한 특성화고 학생들이 진학을 선택하면서 특성화고 취업률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취직 이후에도 고졸자와 대졸자가 받는 차이는 여전히 크다. 신소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 정책팀장은 “사회에 진입하는 초기 단계에서 고졸자에 대한 기본적인 고용 안전성이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임금 수준 등이 보장돼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처우가 열악하다”라며 “고졸자는 승진이나 경력 인정 단계에서 대학 졸업자와 상당한 차등 대우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요즘엔 대졸자수가 많아져, 과거 고졸자가 했던 업무를 사실상 대졸자가 맡는 실정”이라고 분석했다.
젊은 연령대에서 학벌을 중시하면서 부과되는 사회적 비용도 늘고 있다. 신 팀장은 “대학이 본연의 기능, 즉 학문의 전당 역할을 하기보다는 고등학교 연장선상에서 직업 시장에 나가기 이전 몸값을 높이거나 취업 준비에 시간을 유예하는 기능에 머물러 있다”며 “학력 인플레 상황에 대졸을 채용 진입 요건으로 두는 현실은 대학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수천만원의 등록금과 입학금을 불필요하게 납부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