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이 공연을 보고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심란했던 제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한 남자가 있습니다”….
애절한 사랑 고백에 정신이 혼미하다. 웃음과 손뼉 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유튜브에서 ‘오타쿠 발표회’를 검색하면 나오는 동영상은 하나같이 달콤 쌉싸름하다. K팝 ‘덕질’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겼다. ‘오타쿠 발표회’는 1020 세대를 중심으로 퍼지는 새로운 팬 문화다. 자신의 ‘최애’를 과장된 언어와 이미지로 소개한다. 또 다른 오프라인 기반 팬 문화인 ‘생일 카페’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면, ‘오타쿠 발표회’는 친분이 두터운 소수 인원끼리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껏 ‘주접’떨며 해방감 느껴”
그룹 배너의 팬인 박모(21)씨는 지난 8월 고등학교 동창들과 간 여행에서 ‘오타쿠 발표회’를 가졌다. 박씨는 본지에 “유튜브에서 본 ‘오타쿠 발표회’의 유머러스한 전개 과정을 참고해 발표 내용을 채웠다”며 “‘최애’에 ‘입덕’한 계기부터 서사, ‘최애’의 매력 포인트 등을 요약했다”고 귀띔했다. ‘오타쿠 발표회’엔 정답이 없다. 각종 사건·사고로 인해 ‘최애’가 바뀌는 과정이나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관계 등을 다루는 사례도 있다. 애니메이션, 웹툰, 음악 장르 등 좋아하는 분야가 무엇이든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지난달 SNS 친구들과 ‘오타쿠 발표회’를 열었던 A씨는 “각자 좋아하는 사람과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며 “어느 정도 좋아하는 분야가 겹치는 영역도 있고, 무슨 말을 해도 호응해주기로 미리 당부해서 더 걱정없이 즐겼다”고 돌아봤다.
‘최애’에 관해 수다를 떠는 ‘덕톡회’도 인기다. 만화 ‘슬램덩크’를 주제로 ‘덕톡회’를 열었던 신선씨는 “참여 인원이 많을 땐 공통된 화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드게임을 활용하기도 한다”며 “‘덕후’여야 맞출 수 있는 문제들로 텔레스트레이션(그림으로 제시어를 표현해 맞추는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덕톡회’는 ‘오타쿠 발표회’와 달리 별도 발표 자료를 만들지 않아도 돼 보다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오타쿠 발표회’나 ‘덕톡회’는 팬의 시선으로 ‘최애’를 해석하거나 작품의 공백을 상상하는 주체적인 활동이다. 음지에서 주로 활동하던 ‘덕후’들이 ‘최애’를 향한 애정을 숨김없이 토해내는 성토의 장이기도 하다. 박씨는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좋아한 것에 푹 빠져 이야기하니 마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웠다”며 “평소 친구들 앞에서 떨지 못했던 ‘최애’를 향한 ‘주접’(애정 표현)을 마음껏 표출해도 된다는 해방감이 들어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룹 인피니트 멤버 성규를 주제로 ‘오타쿠 발표회’를 열었던 임모(17)씨도 “관심사에 대해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얘기해 즐거웠다”며 “다음에 다른 친구들과 ‘오타쿠 발표회’를 또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면 덕질’ 추구하는 디지털 원주민…이유는
1020 세대는 유년시절부터 인터넷 등 디지털 환경에 노출돼 비대면 소통에 익숙하다. 그런데도 ‘오타쿠 발표회’ ‘덕톡회’ ‘생일 카페’ 등 오프라인에서 팬 활동을 이어가는 배경엔 대면 활동을 통해 친밀감을 나누고픈 바람이 반영됐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비대면 소통이 발달할수록 인간을 대면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진다는 것은 이미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때 증명됐다”면서 “Z세대와 알파세대는 온라인 소통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현실 공간에서 만나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고 짚었다. 신씨는 “좋아하는 것을 오래 좋아하기 위해서는 소속감이 필요하다. 같은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을 나누면 신기하게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며 “(‘덕톡회’ 등 대면 활동은) 서로 얼굴을 보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