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 몰린 ‘불구속 피조사자’…자살 위험 신호 찾으려면

궁지 몰린 ‘불구속 피조사자’…자살 위험 신호 찾으려면

기사승인 2024-01-05 06:05:02
쿠키뉴스 자료사진

수사 중 인권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법무부는 2019년 ‘인권보호수사규칙’을 마련했고, 경찰도 지난해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 배우 고 이선균이 경찰 조사 중 사망하는 등 수사기관 조사를 받던 피조사자가 자살하는 비극이 반복되는 만큼, 보다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매년 검·경 조사 중 피조사자 자살 발생

피의자나 참고인 등이 수사기관에서, 조사 이후 귀가해 또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 절차(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자살하거나 자살 기도를 했다는 소식은 종종 뉴스를 통해 알려진다. 배우 이선균 사건 전에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혐의를 받는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구속)를 후원했던 한 사업가가 지난해 10월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고 일주일 만에 자살한 사실이 알려졌다. 같은 달 유튜버 김용호씨도 구속심사를 며칠 앞두고 숨졌고,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사건과 관련해선 4명이 수사 중 자살한 바 있다.

수사기관 조사 과정에서 피조사자가 불안한 심리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발간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검찰 수사 중 피조사자의 자살 발생 원인 및 대책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검찰 수사 중 자살한 피조사자는 83명에 달한다. 매년 꾸준히 발생하던 사망자는 2011년부터 두 자릿수를 유지하며 증가하는 추세다. 또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소방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검찰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자해를 시도하거나 건강 이상을 호소해 소방당국이 전국 지방·고등검찰청에 출동한 건수는 2013년부터 지난 8월까지 10년간 499건으로 나타났다.

고 이선균 빈소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수사기관, ‘피조사자 보호’ 책임 가져야


지난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피의자에 대한 불구속 수사가 강화된 이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마치고 풀려나와 자살하는 사례가 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수사기관이 수사 관행을 점검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안성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개정 이전에도 수사기관에서 자살하는 사례는 많았다. 하지만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 되면서 피의자가 많이 풀려나는 등 수사기관도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며 “수사기관에 피의자의 보호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피조사자들의 신변 보호에 책임을 지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안실련) 자살예방센터장이자 생명운동연대 공동대표인 양두석 가천대 안전연수원 교수도 “조사 과정에서 모멸감, 압박감 등을 경험한 일부 피조사자들은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많은 고민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라며 “수사기관은 (피조사자의 자살에) 책임이 없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살 위험이 있다면 경호를 하는 등 방안이 필요했다. 사실상 자살 위험이 있는 피조사자를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수사기관에 책임이 없다’고 말 할 수 있을까”라고 지적했다.

공인이 수사받는 경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등 최소한의 인권마저 지켜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임삼진 생명존중시민회의 상임이사는 이선균 변호인이 3차 소환 조사를 앞두고 비공개 조사 요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는 보도와 관련해 “자살로 내몰린 것”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임 이사는 “수사가 목표여야 하는데, 일종의 사회적 지탄이 목표인 것 같았다. 망신주기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이어 “‘알 권리’ 차원에서 한 번 정도의 노출은 피할 수 없겠지만, 비공개 원칙이 맞다”라며 “10시간 넘게 조사하고 만신창이로 나온 사람을 수십 명의 기자 앞에 노출되도록 했다. 공권력에 내몰린 죽음이다.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자살 고위험군’ 확인 절차 필요


전문가들은 자살 위험이 높은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보호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검·경 조사 과정에서 피조사자의 장애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는 지난해 도입됐지만, 자살 고위험군을 확인하는 절차는 없다.

일본의 경우, 수사기관 조사 중 자살 우려가 있는 피조사자는 귀가 조치 시 검찰 직원이 자택까지 동행하는 등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보고서는 “일본의 경우 검사와 경찰의 심층 면접 결과, 자살 우려가 있는 피조사자의 경우 신병 처리를 신속하게 진행하거나 귀가 조치 시 검찰 직원이 자택까지 동행하도록 한다”며 “피조사자의 심리 상태를 가족에게 알리고 보호 및 주의를 당부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안 위원은 “(자살 위험도) 체크리스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피조사자가 조사받으러 가면 대기 시간이 매우 긴데, 그때 체크리스트를 활용하면 된다. ‘인권 보호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피조사자들의 자살 예방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건을 실시간 중계하듯 보도하는 언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양 교수는 “추종·모방 자살 위험 때문에 자살 방법, 동기, 장소 등을 보도하면 안 된다. 과거 한 연예인이 자살했을 때 600명이 따라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라며 “하루 평균 약 35명이 세상을 등진다고 하면, 20배인 700명이 어떻게 숨질지 방법을 고민한다고 한다. 보도하지 않는 것이 ‘자살 예방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
임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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